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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달빛 Sep 07. 2023

#6. 아기곰은 너무 귀여워 으쓱으쓱 잘한다.

<사진: Unsplash의Mika Brandt>

지금은 풍채 좋은 백곰이지만, 남편에게도 물어주고 싶은 아기곰 시절이 있었다.


첫 돌이 채 되지 않은 갓난애기 시절, 그는 오동통한 볼과 왕방울만한 눈, 길다란 속눈썹을 가진 아주 귀여운 아기곰이었다. 당시 최고 예쁜 아가들만 찍는다는 분유 광고 모델 제안을 받았을 정도로 그는 귀여움을 바닥에 흘리고 다니는 치명적인 곰돌이였다.


세 살 무렵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자, 그의 인기는 최절정에 달했다. 엄마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걸어다닐 때면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갈라졌고, 누구든 그에게 말 한번 걸지 않고서는 도무지 가던 길을 갈 수 없을 정도였다. (약간? 상당한? 과장이 섞여 있음을 인정한다.)


"아이고, 웅남이는 커서 연예인 시켜야겠네."

"커서 뭐가 되려고 벌써부터 이렇게 인물이 훤해."

"어머나! 애기가 너무 귀여워요! 볼 한번만 만져봐도 될까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귀찮기도 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고, 선심을 쓰듯 "예, 한번 만져보세요." 하며 웅남이의 한 쪽 볼을 외간 여인들에게 허락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내밀어라'를 몸소 시전한 것은 아니었으나, 갑자기 한 쪽 볼을 꼬집힌 아기곰이 인상을 찌뿌리면, 사람들은 그것마저 귀엽다며 다른 쪽 볼을 마저 꼬집어보곤 했다.


웅남이의 아버지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그의 귀여움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퇴근 후 그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굳이굳이 읍내로 다시 나갔다. 아버지는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터미널 인근을 골라 자전거를 타고 서성였다. 그러면 학교를 마친 여고생들이나 휴가나온 군인들, 퇴근길 아버지들이 여지없이 그에게 모여들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기곰의 귀여움을 칭찬했다. 아버지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내려올 줄을 몰랐다. 단언컨대, 웅남이의 인생에서 가장 효도를 많이한 시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만 세 살을 넘긴 웅남이는 '이제 효도는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둘도 없는 개구쟁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하루라도 맞지 않으면 해가 넘어가지 않았다.'는 명언을 남기셨으니, 그의 개구짐 수준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특히 그에게는 게임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초등학생 시절 웅남이는 특히나 오락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왕년에 한 게임 하던 실력자였다는 것은 불과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오락실 기기가 설치 되어 있는 펜션으로 가족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짐도 풀기 전에 오락실 기기 앞에 후다닥 앉았다. 기기의 전원을 켜고 오락기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자못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는 물 흐르듯 <1945>라는 비행기 게임을 실행하더니 왼손에는 조이스틱을 쥐고 오른손은 검지와 중지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손가락이 보이지 않도록 버튼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오래된 플라스틱 버튼은 1초에 10회씩 얻어 맞으며 '타다다다'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몰고 가던 비행기는 쏟아지는 적군의 폭탄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나는 그 모습에 심히 감탄하여 '곰손'의 정의를 이제 바꿔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뿐하게 게임을 한 판 때리고(정말 '한 판 때린다'라는 표현외에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 원래의 백곰으로 돌아왔는데, 그 표정이 너무나도 의기양양하여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가 이런 실력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오락실에 쏟아 부었겠는가. 그의 어머니는 더운 여름에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 먹으라고 웅남이와 그의 여동생에게 매일 100원짜리를 줘서 학교에 보내곤 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아이스크림을 사 먹지 않고 오락실에 그 돈을 갖다 바쳤다. 그 돈을 낼름 써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 갚을게.' 라며 여동생의 쌈짓돈까지 탈취하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철이 든 백곰은 그때 동생에게 빼앗았던 용돈이 몹시 미안했는지, 지금까지도 사죄하는 마음으로 여동생을 만날때마다 밥을 사주는 것으로 비싸게 갚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집에 있던 허술한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라 동전을 야금야금 빼가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오락실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그의 아버지는 딱 2가지 행동을 매우 싫어하셨는데, 바로 거짓말 하는 것과 오락실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리석은 웅남이는 오락실을 안 갔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아버지는 웅남이에게 네가 맞을 매를 직접 골라오라고 하셨다다. 엉엉 울며 자신이 맞을 매를 찾아다니던 그는 인근 공사장에서 PVC 파이프를 발견한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설마, 저걸로 진짜 때리시겠어?'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얼굴 가득 반성하는 표정을 지으며 파이프를 가져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런 얄팍한 수를 꿰뚫어 보지 못할 분이 아니셨다. 결국 그 날 그는 정말 파이프로 죽도록 맞았고, 그 날로 오락실을 끊었다고 한다. 




10대가 된 웅남이는 사람을 좋아하고 오지랖이 넓은 청소년곰으로 성장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스타일인데, 아무래도 그 시작이 10대 시절이었던 것 같다. 웅남이의 친구들은 그의 집을 마치 제 집처럼 드나들었고, 심지어 집에 웅남이가 없어도 그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 먹고 오곤 했다. 웅남이의 학교 앞에는 포장마차형 분식집이 있었는데, 그는 그 곳을 지나가는 친구들을 죄다 불러 모아 붕어빵도 하나 사 먹이고, 어묵도 하나 사 먹이고, 정작 본인은 돈이 없어서 못 사먹기도 했다. 


그의 오지랖은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해당됐다. 웅남이의 집에는 그가 여기 저기에서 데려온 동물들이 끊이지 않았다. 80~90년대생이라면 학교 앞에서 빨간 대야에 넣어 판매하던 병아리를 기억할 것이다. 어느 날 웅남이는 귀여운 병아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거금 500원을 들여 사들고 왔다. 그의 어머니는 기겁했지만 이미 데려온 녀석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키우기로 했다. 당시 이런 방식으로 판매되던 병아리들은 건강하지 않은 녀석들이 대부분이라 며칠 지나지 않아 쉽게 죽기 마련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병아리는 무럭무럭 자라 닭이 되어 어디론가 판매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또 한 번은 길 잃은 강아지가 불쌍하다며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도 했다. 물론, 그는 데려오기만 하고 키우는 것은 그의 어머니 몫이었다. 지금도 남편곰은 호시탐탐 강아지를 키울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 나는 곰 한마리와 강아지 두마리를 사육하는 것만으로도 넘치게 충분하다.




백곰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쓰며 회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홱!하고 몸을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럴수가. 내가 너무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일까? 내 등 뒤에 10살 아기곰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환상인걸까?


"엄마, 나 무서운 꿈 꿨어. 엄마랑 같이 잘래."


환상이 말까지 거네...라고 생각한 순간, 큰 딸이 나에게 폭 안겼다. 거창한 과학적 증명이 없어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유전자의 실재를 증명한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남편곰을 거푸집처럼 빼다 박은 큰 딸.


갑자기 그녀가 태어났던 순간으로 시계가 되돌아간다. 그때의 내가 보인다. 나는 이제 막 백일을 갓 넘은 큰 딸을 유모차에 태워 보란 듯 데리고 다닌다. 사람들이 유모차 주변으로 몰려 들어 딸의 볼을 한 번만 만져봐도 되냐고 묻는다. 나는 흔쾌히 그러라 한다. 


쇼핑몰에서 쿵짝쿵짝 BGM이 흘러나온다. 나는 세 살난 큰 딸을 일부러 쇼핑몰 로비 쪽으로 데리고 간다. 그녀가 BGM에 맞춰 오리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춘다. 사람들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꺄아! 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내 입꼬리도 덩달아 씰룩거린다.


세 살난 딸과 세 살난 남편곰의 얼굴이 잠시 오버랩된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한 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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