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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범 Aug 09. 2023

소외를 해소할 용기에 관하여

소외의 다양한 측면을 제시한 영화, <코다> 

언어와 환경이 달라 생기는 소외는 언제 어디서든 이뤄질 수 있다. 설령 그게 나를 지극히 아껴준 부모로부터 생긴 것일지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영화 <코다> 중 주인공 루비에게 놓인 삶이 그렇다. 루비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농인인 가족과 함께 살아가며 그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삶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대해 끝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 노래를 불러보아도 좋거나 싫다는 반응을 해줄 수 없는 농인 가족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또 음악을 더 배우기 위해 대학을 가고 싶어도 통역이 가능한 루비 없이 가족이 어업을 지속하기 어려우며, 시장에 나가 도매상과 거래를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루비는 짝사랑하는 메를린을 따라 들어간 합창단 첫 수업에서 노래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소절도 부르지 못하고 교실 밖으로 도망친다. 

영화 <코다> 공식 포스터 


추측건대 루비는 학교에서도 소외를 느꼈을 것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부모님을 도와 작업을 끝내고 등교하면 친구들은 “비린내가 난다”, “부모가 말을 못한다”라는 이유로 그녀를 가십거리 삼는다. 또 매를린조차 “루비의 부모님이 섹스 소리를 격렬하게 낸다”며 루비의 농인 부모를 조롱한다. 이렇듯 영화 <코다>의 초반부는 루비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느끼는 소외와 이로써 그녀가 포기한 재능에 대해 다각적으로 조망했다. 영화 중반부는 루비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주는 은사를 만나 노래에 점차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삶에 의미를 찾았다는 전개로 진행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선 은사 선생님이 루비에게 버클리 음대로 진학해볼 것을 제안했으나, 루비는 부모의 반대와 현재 환경에 대한 고려로 시험 응시를 주저한다. 


루비가 주저했던 이유도 당연 소외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어진 재능보단 당면한 책임이 앞선 상태. 그리하여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태. 물론 은사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무언가를 상실하는 기분 속에서 지속된 고립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사를 통해 재능을 발견하다는 것과, 재능의 발견을 통해 재능을 능력으로 만드는 것 사이엔 큰 문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의 문제에서 루비의 앞길을 가로막는 환경과 재능사이의 괴리와 그로 하여 느껴지는 소외의 문제는 오히려 더 큰 문제로 그녀의 실존을 위협했다. 

(왼쪽) 루비의 가족들, (오른쪽) 가족의 바닷일을 돕는 루비

영화의 말미에서 부모는 학내 공연이 끝난 뒤 루비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음악에 재능이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녀가 버클리음대 시험에 응시하도록 돕고자 마음을 다진다. 그야말로 해피엔딩이다.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외의 환경을 해소할 수 있던 이유는 은사 선생님의 도움과 부모의 변화 덕분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디에 또 있을까. 이 영화는 초반부에선 다양한 장면적 구성을 통해 루비가 처한 소외적 환경이 꽤 다수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일 수 있다는 공감대를 이끄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저마다 처한 소외의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는 다소 밋밋하게 끝내고 말았다. 아니, 다소 폭력적으로 끝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처한 소외를 루비와 같이 해결할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제시한 바대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물론 소통은 어려우나 마음씨 따듯한 부모를 만나 그들이 생각을 바꾸길 기다리면 되는 걸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의 삶 속에선 그러한 은사도, 부모도 없는 경우가 많다. 단지 루비와 같이 주저했을 뿐인데, 그때부터 뒤처지기 시작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영화는 정말 ‘아름다울려고’만 한 영화와도 같다. 소외의 다층적 원인을 제시하는 데엔 성공했으나, 그것을 해결하는 법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밋밋하게 끝내버려 이 영화의 후반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희망보단 비관을 낳을 수도 있는 반쪽짜리 영화가 되고 말았다. 션 헤이더 감독은 왜 이 영화를 이렇게 끝내고 말았을까. 소외의 해소는 스스로를 바꾸려는 용기로부터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용기는 지난한 실패와 상실을 겪고서, 스스로에게 처한 굴레를 벗어던지려는 절박함으로부터 우러나와 해결의 근사치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게 아닐까. 


루비의 공연이 끝난 뒤 박수를 치는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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