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성준 Dec 24. 2017

가지 않은 길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여행기의 장점은 작가의 눈에 비친 여행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례길 여행기라고 하면 대개 종교적 스승이 등장하여 영적 깨달음을 주고 홀연히 사라지는 종교적 체험에 대한 구도기를 상상하게 마련이지만, 그 대신 이 책은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준다. 그래서 독자는 순례길에서의 영적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보다는, 순례길을 걷는 과정 속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했던 작가의 경험과 사유, 그리고 감정의 변화까지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이라는 제목은 작가가 걸었던 길의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것 같다.



작가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파울로 코엘료가 이 길을 30일 동안 걷고 일생이 바뀌었다는 말에 회의적이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향하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여기 무엇을 얻으러 왔는가?’ 이는 다소 실존적인 질문 '나는 누구인가?' 와 삶에 대한 방향성,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혼자 걷는 카미노는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걸음에 집중하는 시간으로써,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시간이었다. 


사실, 이런 질문은 누구한테나 살면서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작가는 이에 대한 나름의 답으로써 - 순례길 여행 전부터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순례길 이후에 얻은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책의 한 구절을 빌자면 -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일은 자아 내부에서 그때까지 몰랐던 뭔가를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었다. 곰곰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내면의 노란 화살표를 발견하는 사람도 있기야 있을테지만 내겐 맞지 않았다. 오히려 관심이 끌리는 사소한 일들의 실행, 시행착오와 평가를 통해서만 내 지향을 발견하는 일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딴 걸 해봤자 뭐한담, 싶을 때에도 관심이 끌리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그 일을 좋아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다. (228p)


인생의 갈림길에서 각각의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상황에 놓이면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현명한걸까? 순례길에서 등장하는 이정표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현실에는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물론 주변에서 조언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뭔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지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자기가 뭘 좋아하고 지향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의식적으로 이를 찾기 위해 질문을 하면 대개 ‘되고 싶은 나’와 ‘지금의 나’를 헷갈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타자화하여, 본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찾은 나의 성향 중 하나는, 질문 없는 루틴한 삶의 공허함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이었고 - 심지어 인내의 대가가 얼마간의 돈을 담보한다고 할지라도 - 그 덕분에 아직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전공을 바꿔가며 10년째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른에 들어서도 아직도 초보 연구자로서, 의미있는 연구를 해보려고 생명끈과 가방끈을 일정 비율로 교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중에 자주 느꼈던 감정이 참 잘 표현되었다:


내가 죽음을 앞둔 시점이라면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는 다른 사람의 기대, 선택의 결과, 성취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 이후 펼쳐질 미래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더라도 당장 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중략)… 어쩌면 나는 이미 마음 안에 불투명하지만 조심스럽게 어떤 방향을 기리키는 노란 화살표를 갖고 있는데, 화살표가 가리키는 길이 진창길이나 험한 언덕일까 두려워 주저하는 것은 아닐까, 중요한 건 화살표를 따라 산길을 오르거나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하는 기대, 그리고 그 기대를 품고 지금 당장은 땅에 밀착해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는 인내, 그것뿐이지 않을까. (231p)






그렇다면, 자신의 성향 파악하고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이제 삶의 방향을 찾았으니 언제나 즐거워야 할까?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뭔가를 배우며 일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쁨과 성취감, 그리고 적당히 견딜만한 고통을 동시에 수반하는 과정인 것 같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타인과의 비교와 경쟁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 부정적인 경험을 더 크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에 대비되는 교환가능한 양의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고 싶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의 인내 또한 필요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무엇을 감수할 준비가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물론, 인내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적당한 시점에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다시 인내하고 달릴 힘을 얻기 위해서 다리를 움직이며 다니는 여행은 참 좋은 일이다. 한 3년 전쯤, 혼자 전국 일주를 20일 정도에 걸쳐서 했던 적이 있는데, 여행 중에 만난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는 깊은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눌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소속도 모른 채로 하루이틀이면 다른 길을 갈 사람이니 오히려 부담이 없었다. 


강릉에서 만났던 서른 초반쯤 되었던 결혼을 한 달 앞둔 어떤 예비 신랑은 걱정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자신이 곧 이루게 될 가정에서 좋은 남편이자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지만 나름의 결심을 위해 여행을 왔다고 했다. 경주에서 만난 마흔 줄에 들어선 듯한 과일 트럭을 끌며 장사를 했었다는 어떤 아저씨는, 이제 장사 대신 다른 길을 알아보기 위해 여행을 왔다고 했다. 통영의 어느 숙소에서 만났던 친구는 대학생 겸 게스트하우스 매니저였는데, 작가가 되기 위한 꿈을 이루기 위해 방학 동안 내려와서 일을 하며 글을 쓴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여행을 하는 중에 일정이 맞는 사람들과 잠깐동안 동행하며, 이들을 거울삼아 나를 돌아보고 작은 변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교류를 여행길 위에서 만들어지는 직물이라고 표현했다.


낮선 이들이 전혀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런 순간엔,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무정형의 공동체에 합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순례자들이 각각 씨실과 날실이 되어 카미노라는 거대하고 다채로운 무늬의 직물에 자기 자신을 짜 넣는 것 같았다. (132p)


작가는 카미노에서 만난 이들의 여행 후 뒷이야기까지 친절하게 소개한다. 여백으로 남겨두어도 좋았을 법했지만, 씨실과 날실의 관계는 교차 후에도 유의미하게 이후 각자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작가는 한 발 물러서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이는 자신의 의지가 수반되어야 가능한 것이라 한다.


어떤 이는 카미노에서 겪은 고통과 성취, 고독과 연대감, 불안과 믿음을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경험으로 통합해내는 데 성공한 반면,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카미노가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카미노는 촉매 이상의 역할이 아니었을 것이다.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결국 자신의 힘일 테니까… 어떤 대단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사람이 저절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만 변화하기로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속도였다. (300p) 






여행을 하면서든, 혹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든, 스쳐가는 인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인연이었던 사람들로 인해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변해가고자 하는 나라고 답한다면, 이는 살면서 항상 간직할 법한 말인듯 하다. 지금을 충실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과거의 모든 시점의 내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마침내 주어진 삶에 온전히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분명한 것은 과거의 어떤 시절로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무수한 가능성들 중에서 내가 선택했던 떠밀렸던 간에 내 현실이 되어버린 일들이 과거에 빼곡했다. 그것들 중 무엇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들의 총합이 나였다. 심지어 남동생을 다시 잃는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그 아이의 누나로 살기를 다시 선택할 것이다. (259p)


변화는 잊고 싶은 나를 지우고 분절된 시점부터 새롭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선 상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미 걸어온 길에서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들, 그리고 아직 가지 않은 길에서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과 함께하게 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여행의 의미를 고민해보고자 한다면 읽어보아도 좋을 만한 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을 끓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