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4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유롭고 따사로운 부다페스트
어젯밤 부다페스트의 첫인상이 부랑자였던 것이 민망하게 부다페스트 지하철역이 너무 예뻐서 반해버렸다. 숙소에서 나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회쇠크 광장. 부다페스트는 낮에 할 게 없다던데 그렇지 않았다. 회쇠크 광장하고 바이더후냐드성, 시민공원을 천천히 걸어 둘러보았는데, 이번 여행 중 가장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근사한 성이나 동상보다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광장 한쪽의 아이스링크였다. 아이스링크에서 한가로운 때를 보내고 있는 이 도시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참 좋았다. 평화로운 이 도시의 일상, 각자의 행복한 시간들이 눈에 보여 그저 기분이 좋아졌다. 장갑만 있었다면 나도 당장 저 안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숙소는 한인민박인데, 한인민박에 오니 이슈는 단연 '코로나 바이러스'다. 한인민박 사장님에 따르면 여기도 최근 불안감이 생기고 있고, 동양인이라서 따갑게 쳐다보는 일도 겪으셨다고 한다. 이탈리아 베니스 카니발은 남은 일정이 다 취소되었다고 한다.
내가 봤던 성당 중 가장 아름다운 성당, 성 이스트반 성당
유럽에서 하도 많은 성당을 봐서 별 기대를 안 하고 들어왔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벽면은 붉은 대리석으로, 천장과 곳곳의 장식은 금으로 뒤덮여서 엄청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성당이라기보다 벨베데레나 미술사 박물관처럼 아름답게 지은 궁전 같다고 느꼈는데, 성당의 유래를 찾아보니 선왕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성당이어서 그랬나 보다. 성당이 이리도 아름다워도 되나, 정말 황홀했다.
현실은 잠시 미뤄두기 위하여
오전에 한국에서 연락이 왔었다. 퇴사한 회사에서 실업급여 신청이 안 된다는 과장님의 연락. 실업급여 신청이 안된다는 것도 황당하고 기분이 상했지만, 무엇보다 그 카톡 하나에 갑자기 여행지에서 '현실'로 확 돌아와서 기분이 안 좋았다. 현실을 잊고 여행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실로 멱살 잡고 끌려간 기분. 애써 잊고 기분 좋게 여행하려 했지만 괜히 다운되었다. 그런데 성 이스트반 성당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다시 현실을 잊고 여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아름다운 성당에서 심란한 마음을 조금 차분히 하고 가려고 소원초도 켜봤다. 실업급여와 가족의 건강을 빌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화장실에 갈 겸 카페에 가서 창가에 앉아 생맥주 한잔 마시니 기분 업! 화장실 시원하게 다녀오고 맥주 한잔 마시니 세상에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맥주 한잔과 공짜 화장실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가. 여행에서는 참 쉽게 행복해진다. 이렇게 근심은 안녕! 현실의 고민은 돌아갔을 때 하자! (소원초 덕분일까, 결국 실업급여 문제도 잘 해결되었다!)
부다페스트의 유대인을 추모하는 방법
유대인 신발 조각들. 절벽 같은 다뉴브강 앞에 늘어져 있는 신발들이 한 발이라도 더 내디디면 떨어질 것 같아 섬찟했는데, 한편으로는 자유를 갈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왠지 자유로워 보이기도 해서 이승에서는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만든 걸까 싶었다. 나중에 베를린에서 알았는데, 헝가리도 유대인 학살에 큰 피해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런 추모 작품이 있었구나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헝가리,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는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여행하면서 참 새로운 것도 많이 알게 되고 즐거웠다. 각 나라의 역사, 문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퍼즐처럼 맞추어지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부다페스트 성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하필 점검 기간이었다. 그래서 걸어 올라왔는데 천천히 풍경도 보고 생각보다 아주 짧고 걷기 좋은 길이어서 편하게 올라왔다. 크게 볼 건 없어서 한 시간 정도 둘어보고 내려왔다. 역시 부다페스트는 야경 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구나 싶었다. (반나절만에 생각이 바뀜..)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아서 천천히 동네 구경이나 해보려고 내려왔다.
우연히 발견한 빈티지 가게
부다페스트성에서 어부의 요새로 걸어가는 길, 작은 빈티지 숍을 발견했다. 오래된 컵과 접시들이 너무 예뻐서 한참 구경하고 이 중에 어떤 애를 데려갈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작은 에스프레소 잔 두 개를 사왔다. 1980년대 만들어진 컵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그넷도 특이하고 예뻤는데 너무 비싸서 안 산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부다페스트에서 결국 마음에 드는 마그넷을 못 샀기 때문이다..
황홀하고 쓸쓸했던 부다페스트의 야경
일몰과 야경을 보려고 다시 어부의 요새로 갔다. 일찌감치 가서 기다리다가 너무 추워서 카페에서 잠시 몸을 녹이고 나와 일몰과 야경까지 보고 내려왔다. 노을이 지며 핑크빛에서 점점 푸른빛으로 바뀌고, 하나 둘 조명이 켜지다가 완전히 어두워지고, 국회의사당에 불이 켜지는 시간을 모두 지켜보았다. 매시간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바뀌는 장면들이 다 너무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혼행의 쓸쓸함을 느꼈다..! 혼자 온 사람이 진 짜 로 나뿐이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군중 속의 고독을 느꼈다. 풍경은 너무 아름다운데 이 감상을 나눌 사람이 없는 슬픔. 무엇보다 나도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은데 내 사진 (성심성의껏) 찍어줄 사람이 없는 슬픔! 서로 열심히 사진 찍어주고 있는 한국인, 외국인들에게 부탁해도 다들 자기 일행 찍어주듯 찍어주지 않으니까 왠지 섭섭한 거다. 사진은 애정이 담겨야 하는데 다들 대충대충 찍어줘서 나홀로 슬펐다 흑흑. 그런데, 그렇게 쓸쓸한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한 한국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나홀로 쓸쓸한 시간을 보낸 걸 이렇게 보상받는 건가 라고 느낄 정도로 좋았는데, 저녁 약속이 있던 터라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서둘러 헤어졌다. 오늘 아침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비엔나에서 동행했던 친구를 만나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던 게 어찌나 후회되던지..! 그렇게 아쉽게 발을 돌렸다. 역시 여행은 순간순간의 선택이 아주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불쾌한 식당 사장에 대처하는 법
비엔나에서 만났던 친구와 다시 만나 구글 평점이 좋은 로컬 식당에 갔다. 음식은 무난했는데, 사장이 문제였다. 장난이랍시고 내 일행에게 자꾸 스킨십을 해서 일행이 몇 번이나 하지 말라고 정색하고 얘기했다. 단호하게 얘기하니 더 이상 불쾌한 장난을 하지 않아서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받았는데, 팁이 포함되어 있었다. 헝가리어로 적혀 있어서 혹시나 하여 찾아보니 팁이 맞았다. 우리는 사장의 태도가 불쾌했고 팁을 줄 만큼 훌륭한 서비스도 전혀 없었으니 팁을 뺀 금액을 주었다. 사장이 자꾸 팁을 포함한 금액을 요구하길래 우리는 팁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 금액을 주는 거라고 했더니 '여기는 원래 다 팁을 주는 거야!'라면서 언성을 높이고 돈을 채가듯이 휙 가져가는 거다. 사장의 태도에 나는 당황했는데, 일행은 주변에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He touched me!"라고 당당하게 얘기하면서 식당을 나왔다. 비록 식사는 유쾌하지 않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낯선 나라임에도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당당하고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일행의 태도가 멋있었고 배우고 싶었다. 무엇보다, 역시 영어를 잘 해야겠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최소 두 번 봐야 해
일행과 헤어진 후 가장 기대했던 부다페스트 야경 명소인 'Batthyany ter' 역에 갔다. 부다페스트에 가면 인스타그램에 꼭 올려야 하는 바로 그 사진! 평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줄을 서서 찍어야 할 정도라는데.. 정말이지 단 한 명도 없었다. 킥보드 타고 한 젊은 커플이 지나가길래 사진 찍어달라고 해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킥보드 타고 핸드폰 훔쳐 가면 답 없으니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깜깜한 밤 아무도 없는 길, 우두커니 서서 불 켜진 국회의사당을 쳐다보는데, 정말 고요하고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아무도 없어서 오히려 쓸쓸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진은 찍고 싶은데.. 다행히 조금 기다리다 보니 한 한국인 남자를 만나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원하던 인생사진을 건지지는 못했지만 나름 열심히 찍어주셔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담장 뒤로 주차된 차들이 다 나오게 찍어버려서 건질 수 있는 사진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남겨서 만족! 숙소에 돌아오니 한인민박 사장님이 야식으로 떡볶이를 해주셔서 맛있게 먹으며, 부다페스트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낮에는 할 게 없다는 헝가리라지만, 하루는 정말 아쉽다. 사실 어제 도착해서도 보려면 야경 볼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진짜 부다페스트 야경은 최소 두 번은 봐야 해!
2020. 2. 14 ~ 3. 11
퇴사 후 떠난 27일간의 유럽여행 일기를 꺼내 읽어본다.
복잡한 마음을 가득 품고 간 '퇴사 후' 여행이었는데, 다시 꺼내 읽어보니 다신 없을 '코로나 이전' 여행기로 다가오는 27일간의 유럽 여행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