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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만쥬 Dec 14. 2020

6일차 비 오는 겨울의 할슈타트

2020년 2월 19일,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하지 못한 말


오늘도 조식을 야무지게 먹었다. 각종 치즈와 햄으로 샌드위치를 조합해보면서 최고의 조합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아쉽게도 오늘은 이 호텔을 떠나는 날. 사랑스럽고 근사한 이 호텔에 대해 아낌없이 칭찬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슈타트로 가는 버스를 놓칠까 봐 급하게 나오느라 사장님께 인사를 하지 못했다. 어제저녁 와인 살 때 얘기할걸. 이 호텔 정말 근사하고 멋져요, 덕분에 잘츠부르크에서의 여행이 훨씬 즐거웠어요, 오래오래 계셔주세요, 언젠가 또 올게요!라는 말. 별거 아닌데 전하지 못하고 떠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사실 어제도 충분히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괜히 미루다 결국 하지 못한 말이 되어버렸다.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은 나도 모르게 툭툭 잘도 튀어나오면서, 정작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여행 첫날 베니스에서 다스베이더를 만난 후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하고 싶은 일 모두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오늘 또 새로운 다짐을 한다. 하고 싶은 말,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모두 해야겠다고.


호텔을 떠나며 이렇게 아쉽기는 처음이다. 여행지에서 호텔이 가장 인상 깊었던 적도 처음이다. 3세기 동안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계속 오래오래 이 자리에 있어 줄 것 같은 잘츠부르크의 오래된 호텔. 언젠가 꼭 다시 올게!



할슈타트도 식후경


전망 좋은 객실을 예약하려면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페리를 타고 드디어 할슈타트에 도착했다. 기차 타고 할슈타트로 가는 길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날씨가 흐려서 사진엔 안 담기지만 넓은 초원에 작은 집들이 있는 게 꼭 심즈 게임 속 마을 같았다. 할슈타트는 보통 당일치기로 많이 다녀오는데, 나는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싶어 숙소를 예약해두었다. 그것도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는 전망 좋은 호텔로. 할슈타트의 숙소비는 워낙 비싸기 때문에, 이왕 비싼 돈 내는 김에 제대로 호사를 누릴 작정이었다. 선착장 앞 호숫가에 위치한 호텔의 호수전망 객실을 예약하고, 따로 메일을 보내 호수전망이 맞는지 확인까지 했다. 두근두근 잔뜩 기대하고 체크인을 했는데...! 이럴 수가 내 방은 1층이었다. 높은 층으로 해달라고 얘기할걸... 조금 아쉬웠지만 방에 들어와 창문을 보니 1층이어도 나름 호수가 잘 보이길래 괜찮네 생각했다. 그런데 옆을 둘러보니, 내 방에만 테라스가 없는 거다!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어 다시 로비로 가서 높은 층 아니면 테라스 있는 곳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가능한 방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전망 좋은 숙소를 예약하려면 층수와 테라스를 잘 확인해야지... 하나 배웠다.


그런데, 사실 테라스가 없는 것도 꽤 좋았다. 내 방은 1층이었지만, 밑에 로비와 식당이 있는 층이 있어 창문을 넘어가면 0층의 지붕(?) 위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오히려 테라스보다 넓고 호수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에 캡슐커피 하나 뽑은 후, 창문에 걸터앉아 호수를 보면 테라스 부럽지 않았다.




나만의 지붕 테라스에서


종일 흐리더니 이내 비가 오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창문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셨다. 여행할 때 나름 날씨운이 좋은 편이라, 할슈타트에 오는 날만큼은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추울 거면 차라리 눈이나 펑펑 내리지 웬 비람.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그저 창밖의 비 오는 풍경을 보면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큰 창문에 걸터앉아 비 오는 호숫가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도 운치 있고 좋았다. 여유 있는 시간을 충분히 보냈을 즈음, 다행히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비가 눈이 되어 내린 순간


이런 집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겨울 할슈타트는 이런 매력이구나
날이 좋지 않아도 아름다운 호수마을


우산을 쓰고 산책을 나왔다. 당일치기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한적한 시간, 관광객은커녕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어 한적했다. 조용한 마을 곳곳을 천천히 걸어보는데, 비에 젖어서 짙어진 할슈타트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흔히들 할슈타트 올 때 날씨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 역시 맑고 쨍한 날의 할슈타트 풍경을 기대하며 이날만은 날씨가 좋기를 바랐는데, 온통 흐리고 비가 오길래 처음에는 망했다 싶었다. 하지만 비 오는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실 때부터 느꼈다. 비 오는 풍경도 나쁘지 않네. 그리고 우산을 쓰고 마을을 둘러보면서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할슈타트는 아름다웠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꼭 동화 속 신비로운 마을에 들어온 것 같았다. 겨울왕국 아렌델의 배경이 되는 마을이라고 하던데, 엘사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을 때 마을의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그토록 날씨가 좋길 바랬건만,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할슈타트는 날씨와 상관없이 사계절 내내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 같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아름답다 라는 대사는 할슈타트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대사인 듯하다.



교회의 조명이 켜지는 순간을 담아준 고마운 친구


고요하고 아름다운 할슈타트의 야경


선착장 앞 케밥집에서 케밥을 사서 숙소로 왔다. 저녁으로 간단히 케밥을 먹고, 완전히 어두워지면 야경을 보러 다시 나갈 생각이었다. 창문턱을 테이블 삼아 케밥을 먹고 있는데, 해가 지면서 바깥세상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딱 내가 좋아하는 시간과 색.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이 푸르스름한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먹고 있던 케밥을 놓고 다시 뛰쳐나갔다. 뷰포인트에 역시나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서서 고요한 할슈타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을에 조명이 하나둘 켜지자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혼자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동양계 외국인 남자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 사람도 한적한 여행지에서 만난 나 홀로 여행객이 꽤나 반가웠는지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었다. 낯선 외국인에게 사진을 맡기면 대충 이상한 구도에 찍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는 아주 성심성의껏 찍어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사진을 찍어주다가 잠시 멈추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교회 조명이 켜질 때가 예쁘다고 깜빡거리는 조명 시간에 맞춰 사진을 찍어주던 친구. 덕분에 할슈타트에서 생각지 못한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완전히 깜깜해질 때까지 서있다 보니 꽤 춥고, 먹다 만 케밥이 생각나서 저녁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멋진 풍경도 보고 근사한 사진도 건졌으니 밥 먹다 뛰쳐나오길 너무 잘했다! 그리고 여기 케밥 진짜 맛있다.



선착장 앞 케밥집 완전 할슈타트 맛집







2020. 2. 14 ~ 3. 11

퇴사 후 떠난 27일간의 유럽여행 일기를 꺼내 읽어본다.

복잡한 마음을 가득 품고 간 '퇴사 후' 여행이었는데, 다시 꺼내 읽어보니 다신 없을 '코로나 이전' 여행기로 다가오는 27일간의 유럽 여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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