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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본부 Oct 09. 2023

이소리 작가 개인전 서문

<불완전한 세포>

2023.5.31(수)~6.6(화)

인사아트플라자갤러리 4층

(서울 종로 인사동길 34-1)

작가와의 만남 6월 3일(토) 오후 3시



불완전하기에 가능한 세 가지 실험 (김본부)

            


수십, 수백 시간, 혹은 그 이상의 공력을 들여 완성되는 작품이 있는 반면, 불과 수십 초, 길어야 1, 2분 안에 완성되는 작품도 있다. 크로키가 그렇다. 크로키는 짧은 시간 안에 본질을 형상화해야 하는 장르의 특성상 종종 덜 완성되었다거나,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밑그림, 혹은 공력을 들여 완성하는 그림 이전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장르라고 종종 인식된다. 당연히 오해다. 

우주를 관측하기 위해서 32시간에 걸쳐 조리개를 열어놓고 우주 저 멀리에서 오는 빛들을 받아들이는 망원경이 있는 반면, 순간 포착을 위해 1/4000초, 1/8000초의 빠른 속도로 눈을 깜빡이는 카메라도 있다. 크로키는 당연히 후자다. 긴 시간을 들여야만 완성할 수 있는 작품이 있는 것처럼, 짧은 시간이어야만 가능한 작품 또한 있는 것이다. 이소리는 오랜 시간 동안 인물 크로키 작업을 통해 인체에 집중해온 작가다. 그런데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변화가 감지된다.      

첫 번째로 감지할 수 있는 변화는 디지털 도구의 수용이다. 단순히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기만 했다면 그리 대수롭지 않을 일이지만, 그녀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녀는 아래와 같은 순서로 <생각하는 남자2>나 <날개 달린 남자>와 같은 기존 드로잉 작업을 복원해냈다.

1. 완성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복원이 필요한 작품을 고르고, 2. 그것을 스캔하여 3. 디지털 드로잉을 통해 복원한 뒤 4. 출력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완성한다. 

이러한 작업은 재료 작업과 디지털 작업을 중첩시키기 때문에 재료 작업과 결별하고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했다는 단순한 선언과는 거리가 있고, 이제는 너무 흔해진 NFT와도 무관하다. 

흔히 작가들이 재료 작업과 디지털 도구를 이용한 작업을 혼용하는 순서는 이렇다. 먼저 디지털 도구를 이용해 에스키스를 그리거나 사진을 찍고, 재료 작업을 통해 그것을 완성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소리의 작업 순서는 반대다. 선행한 재료 작업을 디지털 도구로 완성한다.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과감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이다.      

두 번째로 감지할 수 있는 변화는 대상의 변화다. 이소리는 줄곧 인체와 포즈에 국한해 작업해 왔는데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세포의 속삭임>, <마주보기>와 같은 신작은 우리 몸의 세포나 장기와 같은 내부 기관들을 표현하고 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관심사가 이동한 만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달라졌다. 플루이드 기법부터 아크릴 물감으로 물방울을 만들어 평면에 안착시킨 뒤 터뜨리는 방식까지 다양하다. 

그렇다면 그토록 오래 천착하던 신체와 포즈에서 작가의 관심사가 옮겨간 이유는 무엇일까. 힌트는 작가의 신작 <바이러스 플라워>에서 찾을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휩쓴 3년 동안 우리는 병과 백신을 둘러싼 각종 루머와 과학적 사실, 그것들이 뒤섞여서 비롯되는 사회적 병증에 시달려 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바이러스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기 위한 백신은 과연 안전한지,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를 찾아올 새로운 병증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 풀리지 않은 의문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바이러스 플라워>를 비롯한 세포 연작이다.      

세 번째로 감지할 수 있는 변화는 평면 위에서 제거된 배경이다. 이번 신작들의 형식적인 공통점을 꼽으라면 단연 캔버스나 종이가 아닌,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아크릴 판 위에 작업했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한 것일까? 이 또한 작가의 실험이다. 작가는 배경을 그리지 않는 인물 크로키의 작업 방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배경에 아무 것도 그려넣지 않는 것을 넘어서, 평면 자체를 투명하게 만들어버린다. 이제 평면은 존재하지만, 배경은 보이지 않는다. 평면은 주제를 “올리는” 지지대 역할에만 집중할 뿐, 배경으로써의 지위를 포기한다. 이를 통해 얻는 효과는 대상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가능성까지 열어놓는다. 배경이 투명한 덕에 작품이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그 장소의 경치를 그대로 평면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풀밭 위에 놓인다면 풀밭이 배경이 되고, 바닷가에 놓이면 바닷가가 배경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소리 작가의 신작은 고정되어 있지만 유동적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드러나는 이소리 작가의 특징은 공교롭게도 모두 실험을 향하고 있다. 재료 작업으로 시작해 디지털 도구로 마무리짓는 실험, 오랫동안 탐구했던 인체를 더욱 해부학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실험, 배경을 투명하게 만들고, 다양한 배경을 불러오게끔 하는 실험. 셋 모두가 작품과 작업을 향한 작가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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