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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pr 11. 2024

오르페이데 삼부작

잔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

(계속)


잔 프랑코 말리피에로(Gian Francesco Malipiero, 1882-1973)는 스트라빈스키와 동갑내기이며 그보다 두 살을 더 살았지만, 오늘날 이탈리아 밖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후배 루이지 달라피콜라는 1880년대에 태어난 작곡가 가운데 그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 말리피에로의 오페라 <오르페이데 L’Orfeide>는 동료 레스피기의 <이상한 장난감 가게>나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와 거의 같은 시기인 1918년부터 1922년 사이에 작곡되었다. <오르페이데>는 다음과 같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 가면의 죽음 La morte delle maschere

제2부: 일곱 개의 노래 Sette canzoni

제3부: 오르페오, 또는 여덟 번째 노래 Orfeo, ovvero L’ottava canzone

Gian Francesco Malipiero: L'Orfeide (1918/1922) (1/3)

제1부에서 극장장은 코메디아 델라르테 공연을 선보인다. 광대들이 하나씩 자기소개한다. 베르가모 출신의 두 광대 교활한 브리겔라와 슬픈 광대 아를레키노에 이어 말 많은 발란촌 박사가 무대에 오르다 자빠진다.     

내가 걸려 넘어진 걸로 웃었나? 하지만 걸려서 머리를 다쳤고, 머리를 다치면 의사가 와서 어떤 약을 처방했을 것이고, 약은 약재로 만들어지고, 약재는 동방에서 온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동방에서 지혜가 왔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었으며, 그는 세계의 주인이었고, 세계는 아틀라스가 받치고 있고, 아틀라스는 큰 힘을 가졌으며, 그 힘으로 기둥을 세울 수 있고, 기둥은 궁전을 지탱하며, 궁전은 석공이 지었다, 석공은 건축가가 이끌고, 건축가는 도면을 알고, 도면은 인문 교양이고, 인문 교양은 일곱 가지이고, 그리스의 일곱 현자들은 미네르바의 보호를 받고, 미네르바는 처녀이며, 정의의 여신도 처녀이고, 그녀는 칼을 가지며, 칼은 군인의 것이고, 군인들은 전장에 간다. 전장에서는 탄환으로 살해하고, 탄환은 피렌체의 문장(紋章)이며, 피렌체는 토스카나의 중심지이고, 이곳에서 아름다운 언어가 태어났으며, 아름다운 언어의 왕자는 키케로였고, 키케로는 로마의 원로원이었고, 로마는 열두 카이사르를 가졌으며, 일 년은 12개월이고, 한 해는 네 계절로 나뉘며, 세상엔 네 원소, 곧 공기, 물, 불, 흙이 있다. 흙은 소로 갈고, 소는 가죽을 가졌고, 가죽은 무두질되며, 무두질되면 가죽이 되고,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고, 신발을 발에 신고, 발은 걷으려고 만들어졌으며, 걸어가다가 나는 걸려 넘어졌고, 걸려 넘어져서 여기에 와서 여러분께 안녕하시냐고 말한다.

이어서 겁쟁이이자 허풍쟁이인 선장, 말더듬이 타르탈리아가 횡설수설할 때 나폴리를 대표하는 풀치넬라가 노래로 무대를 장악한다. 그때 붉은 옷에 무서운 가면을 쓴 남자가 채찍을 휘두르며 무대 위로 뛰어올라 극을 방해한다. 극장장은 도망치고 남자는 일곱 광대를 큰 찬장에 가둔다. 찬장 안에서 아우성이 들리는 가운데 남자는 가면의 죽음과 실제의 삶은 무관하다고 얘기한다. 가면을 벗고 오르페오임을 드러낸 그는 채찍을 놓고 리라를 든다. 오르페오는 인생을 더욱 잘 대변하는 새로운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그들이 묵묵히 무대를 오르내리는 동안 찬장 안의 배우들은 굶어 죽겠다고 항의한다. 아를레키노는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고 외치며 찬장을 빠져나온다. 그가 무대 밖으로 나가면 막이 내린다.     

쇼윈도 밖으로 나온 아를레키노

제2부는 일곱 개의 독립장으로 되어 있다. 오르페오가 소개한 새 등장인물이 장마다 등장한다. 각각은 말리피에로가 실제로 겪은 일화를 토대로 한다.

Gian Francesco Malipiero: L'Orfeide (1918/1922)

     

제1곡 나그네 Il vagabondo: 나그네들이 거리에 자리를 잡는다. 맹인과 그를 안내하는 소녀, 그리고 건장한 이야기꾼이다. 이야기꾼은 소녀에게 함께 떠나자는 몸짓에 더해 암시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내게 박차를 잡아주었고

나는 말에 올라탔다

그녀는 내게 창을 건네주었고

나는 방패를 들었다

그녀는 내게 검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박차를 신겨주었다

그녀는 내게 투구를 씌워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이야기했다

안녕이라 아름다운 아가씨여

나는 이제 비뇨네로 가노라     

그리고 비뇨네에서 프랑스로

명예를 얻으러 갑니다.

내가 창으로 가하는 화려한 일격은

당신의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전투에서 죽으면

당신의 명예를 위해 죽는 것이지요

부인들은 말하겠지요

우리 애인 아마도르가 죽었다고

젊은 처녀들은 말하겠지요

우리 사랑을 위해 죽었다고

젊은 과부들은 말하겠지요

그에게 명예를 돌리고 싶다고

그를 어디에 묻을까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에

무엇으로 그를 덮을까요?

장미와 제비꽃으로     


소녀는 행인들이 떨군 동전을 모아 맹인의 모자에 넣고 이야기꾼과 떠난다. 사정을 모르는 맹인은 계속 노래하다가 아무도 없자 동전을 바닥에 던진다. 맹인은 연인이 떠난 반대 방향으로 길을 더듬으며 사라진다. (말리피에로는 베네치아에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보았다. 한 장애인이 바이올린을, 또 다른 맹인은 기타를 연주하고, 한 소녀가 맹인을 안내했다. 그들은 늘 어둡고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형편없는 연주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이올린 주자와 소녀가 맹인을 버리고 떠났다.)

     

제2곡 저녁 기도 A vespro: 노래 없이 마임으로만 이뤄진 장면이다. 멀리서 들리는 저녁 기도 외에는 관현악만이 반주한다. 일곱 개의 초가 타고 있는 교회 안에서 수사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들어와 기적의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허리춤에 열쇠 꾸러미를 단 수사가 여섯 개 초를 끄고 하나가 남았다. 교회 문을 닫으려던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나가라고 한다. 여자가 움직이지 않자 세게 흔들어 내쫓는다. 마지막 초를 끄자 어둠이 내린다. (말리피에로가 카라바조의 마돈나 제단화가 있는 로마 산타고스티노 교회에서 본 장면이다.)

로마 산타고스티노 교회와 교회 내부: 야코포 산소비노의 <기적의 마돈나>와 카라바조의 <로레토의 마돈나>

  

제3곡 귀환 Il ritorno: 아들을 전장에 보낸 노파가 미쳐간다. 하늘을 원망하던 그녀는 아들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떠올린다. 

     

달콤한 잠이여, 하늘에서 내려와 오렴

말을 타고 오렴, 걸어오지 말고

하얀 말을 타고 오렴

성령이 달리는 곳으로

예쁜 말을 타고 오렴

아기 예수님도 달리는 곳으로

이 달콤한 잠 속에서 잘 자렴!

엄마가 노래를 부를 테니 아이야, 잠들어라!

갑자기 고통이 그녀를 다시 붙잡습니다

오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온화한 백합아

아들아, 누가 내 괴로운 맘에 조언해 주려나?

아들아, 기쁜 눈망울을 가진 아들아

아들아, 왜 대답이 없니? 

아들아, 왜 젖 먹던 가슴에 숨는 거니?

     

노래가 점점 무의미한 넋두리가 될 때 밖에 북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지나간다. 아들이 집안에 들어와 다가가자 노파는 뒷걸음질 친다. 이내 불길하게 웃으며 허공을 응시하다가 의자에 주저앉는다. (말리피에로는 베네치아 북부 몬테 그라파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들을 잃은 노파가 자장가를 부르고 울고 인형을 어르다 미친 것을 목격했다.)

제1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인 몬테 그라파. 전몰자를 추모하는 납골당.

     

제4곡 주정꾼 L’ubriaco: 연인이 밀회하려는 집 가까이서 주정꾼이 노래한다. 청년이 여인의 집 창문으로 들어가고 주정꾼은 그 집 계단에 앉아 계속 노래한다. 욕망과 낙담, 현실도피를 얼버무린 낙오자의 노래이다. 갑자기 문밖으로 청년이 뛰어나오면서 주정꾼과 엉켰다가 도망친다. 청년을 쫓아 집에서 헐벗고 나온 노인은 주정꾼을 두들겨 팬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 도망친다. (말리피에로가 베네치아의 밀회를 방해하는 주정꾼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장면이다.) 

산 마르코의 세레나데

제5곡 세레나데 La serenata: 방안에는 침대 위에 시신이 누워있고 소녀가 기도를 올린다. 옆방에선 여인들의 추모 기도와 흐느낌이 들린다. 그때 밖에서 달콤한 세레나데가 들린다. 남자의 절절한 노래에도 여자는 묵묵히 기도한다. 반응이 없자 남자는 창문으로 꽃을 던지고 더욱 격렬하게 노래한다. 여전한 침묵에 남자는 문을 두드린다. 기도를 멈춘 여자가 문을 열자 남자가 들어와 비로소 상황을 깨닫는다. 소녀는 꽃을 주워 침대 위에 뿌린다. (말리피에로가 베네치아에서 목격한 세레나데와 장송곡의 엇갈림을 소재로 했다.)     


제6곡 종지기 Il campanaro: 문밖으로 종탑이 보인다. 불이 나 군중이 우왕좌왕한다. 느리고 엄숙하게 종소리와 대조적으로 종지기는 경박한 노래를 부른다. 애도하는 소리와 더불어 불은 점차 사그라든다. 종지기는 아랑곳없이 노래를 끝까지 마친 뒤 불이 꺼진 것을 보고 종탑에 앉아 파이프에 불을 붙인다. (페라라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말리피에로는 조종(弔鐘)을 울리던 종지기가 ‘여자의 마음 La donna è mobile’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프란체스코 과르디, 산 마르쿠올라 유류 저장고의 화재, 1789. 뮌헨 알테피나코테크

제7곡: 재의 수요일 새벽 L’alba delle ceneri: 한 작은 마을, 등지기가 가로등을 끌 때 장례 행렬이 지나가고, 뒤따르는 참회자들이 사람들에게 기도를 청한다. (이때 등지기가 부르는 노래는 제1곡의 나그네가 부르던 것과 곡조와 가사가 같다) 가면을 쓴 광대 일행이 거리에서 춤을 추다가 장례 행렬을 가로막는다. 갑자기 장의차에서 죽음을 형상화한 인물이 나타나자 광대들은 놀라 흩어진다. 광대 중 하나는 소동 틈에 모자를 잃어버린다. 참회자들은 계속 노래한다.     


고통, 눈물, 그리고 참회가

우리를 여전히 괴롭히네

이 죽음의 행렬이

참회를 외치며 지나가네

우리도 한때 너희 같았지만

너희도 언젠가 우리처럼 될 거야

우리가 죽었다는 걸 보다시피

너희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을 것이고

악을 저지른 후에 

저세상에서 참회해 봤자 소용없으리

우리도 한때 카니발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쾌락을 즐겼고

그렇게 죄악 속에서

우리 죄를 더욱 늘려갔지

이제 세상을 돌아다니며 외치네

참회하라! 참회하라!     


장례 행렬이 지나가자 모자를 찾으러 온 광대는 카니발이 끝나고 돌아오는 가면 쓴 소녀와 마주친다. 둘은 함께 떠난다.    

 

제3부 ‘오르페오, 또는 여덟 번째 노래’는 극중극이다. ‘첫 번째 극장’에는 왕, 여왕, 그들의 수행원, 기사(테너), 귀부인, 음료 행상(테너), 관객(귀부인들과 기사들)이 자리한다. ‘왼쪽 극장’에는 가발 쓴 기사들과 그들의 귀부인들, ‘오른쪽 극장’에는 아이들, ‘가운데 극장’에는 네로(바리톤), 그의 시종, 아그리피나(소프라노), 형리, 오르페오(테너)가 등장한다.    

Gian Francesco Malipiero: L'Orfeide (1918/1922) (3/3)
18세기 극장에 궁정인들이 모여 있다. 한 기사가 귀부인의 관심을 끌려고 하지만 음료 행상이 시끄럽게 호객해 방해한다. 기사가 음료를 전부 사서 행상을 물린 뒤 그중 한 잔을 부인에게 권하지만 그녀는 가버린다. 왕과 왕비가 도착하자, 각각의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된다. 그것은 인형들이 부르는 노래극이다. 네로 황제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처형을 명하고 형리가 오열하는 그녀의 목을 벤다. 네로가 살인의 당위성을 노래할 때 한 무대에서는 “살인자!”라고 외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만세!”를 환호한다. 네로는 이어서 로마에 불을 지르라고 명한다. 멀리서 불길이 번지는 것이 보인다. 네로는 자화자찬을 노래한 뒤 아그리피나의 시신을 차서 무대 밖으로 떨어뜨린다. 한쪽에선 분노가 넘치고 다른 쪽에선 미친 듯한 박수가 터져 나온다. 왕과 왕비 및 동료 귀족들은 무심한 듯 연극을 지켜본다. 갑자기 세 무대가 어두워지면 중앙으로 피에로 복장의 오르페오가 들어온다. 그는 관객들의 무심함에 놀랐다고 말하며 자신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겠다고 선언하고 리라를 타며 노래한다. 점차 모두 잠에 빠져들지만 여왕만이 그의 노래에 감탄한다. 두 사람은 일어나 손을 잡고 입을 맞춘 뒤 떠난다. 모두 잠든 가운데 불이 꺼진다.

이렇게 말리피에로의 <오르페이데> 3부작은 다층적인 극중극이다. 무대 안에 또 무대가 존재하고 작곡가의 체험이 거기에 녹아든다. 말리피에로의 동시대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가 쓴 <작가를 찾는 여섯 등장인물 Sei personaggi in cerca d’autore, 1921>과 일맥상통한다. 

메타연극의 효시

직접 대본을 쓴 말리피에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피란델로와 같은 시기에 ‘메타테아트로’, 곧 극에 대한 극의 형식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높이 살 만하다. 말리피에로는 평생 몬테베르디의 발굴에 매진했다. <오르페이데>에는 몬테베르디 첫 오페라의 타이틀롤 오르페오(<오르페오>)와 마지막 오페라의 주인공 네로(<포페아의 대관식>)가 출연한다. 현전하는 세 오페라 가운데 남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개작한 사람은 그의 후배 루이지 달라피콜라이다(<울리세 Ulisse, 1968>). 이렇게 해서 오페라 400년의 역사는 완결된다. 물론 영화가 이미 그 왕좌를 이어받은 뒤였다.

1925년 뒤셀도르프에서 초연된 <오르페이데>는 1936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1966년 피렌체 테아트로 델라 페르골라에서 전막 재연되었다. 2부만으로 공연된 적은 좀 더 많아서 1926년 토리노에서 라벨의 <스페인의 시간>과 함께, 1929년 로마에서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와 함께, 1969년 에든버러에서 달라피콜라의 <죄수 Il prigioniero>와 나란히 무대에 올랐다. 이 가운데 헤르만 셰르헨이 지휘한 피렌체 실황이 이 걸작의 유일한 녹음이다. 셰르헨은 지휘 도중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공연을 마친 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닷새 뒤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셰르헨의 딸 미리암은 뒷날 타라 레이블을 설립했고, 1996년 아버지의 마지막 실황을 발매했다.     

위에 링크한 유튜브 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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