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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Apr 25. 2019

우리의 지중해는 닳지 않는다.

서로가 있기에. 서로가 있는 한.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 김영하 -



지난 주말 거진 6년 만에 보는 선향이와의 약속이 있었다.

6년 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수다는 만나는 순간부터 쉼 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동안 왜 연락하지 못했는지 같은 것들.


살랑살랑한 4월의 주말 강남역 카페는 선다방 촬영지처럼 서로를 알아가려는 두 사람의 조합으로 가득했는데, 우리만이 옛 추억을 열심히 복기하느라 바빴다. 모든 인연과의 추억에는 나름의 특별함이 깃들어있지만, 그녀와의 추억에는 끝없는 푸르름이 있다.

6년 전 그리스와 터키를 함께 여행했던 선향과 나는 순식간에 강남 한복판에서 지중해로 날아갔고, 닳지도 시들지도 않은 추억을 만지작대며 "그거 기억나지!"를 연신 외쳤다.


주말 출근으로 함께 보지 못한 유리 언니까지 우리 셋은 죽이 참 잘 맞았다.

배낭여행 동호회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원래 처음부터 같이 여행을 계획한 친구처럼, 아니 그보다 더.

셋이 함께 해서 예쁜 풍경은 눈이 부신 풍경이 되었고, 짜증 나는 순간은 말도 안 되게 웃긴 순간이 되었다.

그곳으로 떠나온 각자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산토리니의 하얀 지붕 위에 누워 손을 잡고 은하수를 구경하던 밤의 느낌은 잊히지가 않는다.

이 위로 뜨는 별들은 정말. 정말 근사했다. 정말이 두 번이다.



심지어 지금은 나의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여행을 대체 왜 결심했었는지.

당시 어떠한 이유에서 꽤나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고, 조금 먼 곳보다 더 멀리 있는 저어기 어딘가에 닿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남미나 아프리카로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여행 쪼렙이었고, 언젠가 스치듯 본 산토리니의 파랗고 하얀 색감이 계속 어른어른거리고, 마침 그때 즈음 학교에서 받은 장학금이 딱 지중해 배낭여행 비용이랑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래. 한 줄의 목표로 정리하라면 산토리니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정도.


그래서 직접 본 그곳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상상에서는 그렇게까지 멋지지 않았다. 상상만으로 설레기는 했어도 마음이 울렁이지는 않았다.

마음을 움직인 건 온통 하얗고 파아란 색감으로 가득한 풍경이 아니라,  

그곳에서 마주치고 마주 보고 했던 총체적인 어떤 느낌이었다.


그리스 식당에까지 나의 천성적인 덜렁 거림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가는 바람에 밥을 먹다 말고 유리컵을 와장창창창 하고 깨뜨려 어떡하지- 울상을 하고 있으니, 식당 매니저가 다가와 여기선 그릇을 깨는 게 나쁜 운을 내쫓는다는 의미인데, 너 덕분에 우리 가게에 행운이 깃들겠다. 정말 고마워하고는 안아주었던 느낌. (그리고 그 매니저는 놀랐지? 하며 사탕 몇 개를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울 뻔했다.)

울퉁불퉁 돌길을 따라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눈을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거나 인사를 건네던 순간들.

끝내주는 바다와 마을을 한참 내다보다 탄 숙소행 밤 버스에서 선향이와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곤 듣던 노래. 웃느라 입이 아프고 배가 아프다면서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던 세 명의 웃음소리. 시시껄렁함과 진지함의 사이를 메트로놈처럼 오가던 많은 대화들.




나의, 우리의 지중해는 거기에 있었다.

하얗고 파란 나나 나나나나 나나-의 포카리스웨트 광고 속 장면이 펼쳐지는 이아마을이 아니라, 그런 총체적인 시간들에.


그래서인 것 같다.

가끔 그리스 산토리니를 다녀왔다는 사람과 이아마을에서 선셋 봤어? 수블라끼 먹었어? 같은 대화로는 그 자리에서 지중해로 날아갈 수 없는 이유를. 지난 주말 재회를 기점으로 다시 개설된 세 명의 단톡 방에서 후덥지근한 푸른빛 지중해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드는 이유를.

피르고스 마을의 어느 레스토랑 방명록. 우리가 적은 공책 이후로 몇 권이나 새로운 공책이 놓아졌을까.


아- 다시 여행할 때가 된 것 같다.

낯선 어딘가로, 색이 바래지 않을 아니 바래도 좋을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여행.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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