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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Apr 21. 2019

생활은 괜찮니?

고용 관계에서 오가는 질문계의 희귀종

다행히도 그리고 아주 감사하게도 일을 통해 만난 사람 중에는 좋은 분들이 많았다.

인턴이나 직원으로 근무하던 회사뿐만 아니라,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하던 몇몇 일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대학생 때 함께 일했던 카페 점장님과 파트너 오빠와는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지 5년이 된 지금까지 연락하고 만나고 있을 정도다. 내가 기억하는 좋은 분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한 일을 꾸짖거나 트집 잡기보다는 일을 더 발전시켜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려주고, 모르는 것을 도와주려는 피드백을 주셨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수많은 직간접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당연한 일이 실로 어렵다는 것을 안다.


물론 골백번 우려먹은 알바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내게 쌍욕을 하면서 음료 잔을 통째로 집어던진 카페 점장도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소심하게 님을 뺀다. 그때 나는 뒤돌아서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 음료는 날아와 나를 살짝 스치며 싱크대에 내다 꽂혀 사방으로 튀었다. 이유인즉슨, 그는 음료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손님에게 나가기 전 음료의 맛을 보라고 지시했었는데, 본인이 마침 그 음료를 시음해보니 맛이 일정치 않았던 거다. 사실 그건 내가 만든 것조차 아니었는데, 무작정 나에게 던지고 욕을 퍼붓는 행동이 얼떨떨해서 한 마디도 입 밖으로 안 나왔다. 당시 느낌 상으론 내가 만들었느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퍼붓고 싶은 상대가 필요했고, 내가 가장 만만했던 거다. 음료 중요하다. 중요하지. 하지만 그래 봐야 자몽차 당도가 3이냐 5냐 아닌가? 구인 사이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다하는 기미상궁을 뽑는다는 말도 없었건만.

(사진 출처: MBC 드라마 '군주' 장면 캡처)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이런 류의 썰을 안겨준 건 그 점장과 다른 카페 사장님 둘 뿐이다. 이 정도면 아주 감사한 비율이다. 다른 분들은 대부분 다정하셨다.

혹독하고 냉엄한 사회의 차가운 상사와 사장을 상상했던 나로서는 가끔 당황스러울 정도로.

지금까지 연락하는 점장님은 월급날에 늘 계약된 알바비보다 더 많이 어떨 땐 더더 많이 얹어 입금해주셨다.

일한 시간 대비 계산해보면 당시 시급 5,580원을 훌쩍 넘어 있었다. 사실 이거야말로 아르바이트 세계의 픽션이다. 7시간 내내 물 한잔을 마실 시간 없이 바쁘고, 쉴 틈 없이 템핑을 하느라 손목이 욱신거릴 만큼 손님이 와도(실제 이렇게 일한 카페가 있었다) 알바생에게 주는 시급에 인센티브 따위는 없거늘.


인턴으로 근무한 회사에서는 팀 전체가 아직 학생티 폴폴 나는 인턴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회사 내규로 정해진 월급 이상을 주지 못하니 매일 점심을 한 분씩 돌아가며 사주셨다. 부장님 데이, 차장님 데이, 과장님 데이의 3일 사이클로 세 달의 점심이 꼬박 채워졌다. 대충 일만 시키실 만도 한데 앞으로 어떤 일이 하고 싶은지, 어디에 이력서를 넣고 있는지,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썼는지를 항상 먼저 물어봐주시며 자기소개서 첨삭까지 도와주셨다. 인턴 근무 도중 회사 면접이 잡혀 면접을 다녀와도 괜찮은지 여쭤보자, 부장님은 카드를 건네시며 택시 타고 다녀와- 하셨다. 말할 것도 없이 일은 디테일하게 잘 가르쳐 주셨고. 인턴 생활의 장르는 감사함 자체였다.


이후 회사에서 같은 팀으로 일하던 실장님과 사수쌤은 다정하다 못해 스윗하셨고, 무엇보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셨다. 나도 모르게 사수쌤을 언니라고 부른 적이 있을 정도다. 의기투합해서 보고서를 써내는 분위기도 좋았고, 센스 있는 취향을 가진 사수쌤이 추천해주는 퇴근 곡을 들으며 퇴근하는 길은 즐거웠다. 건강 상태에 적신호가 켜지고 서울을 당분간 떠나 있기로 한 후, 일을 정리하게 되었을 때도 여러 모로 편의를 정말 많이 봐주셨다.

의외로 회사라는 곳에서 인간관계로 고민한 적은 한 손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였는데, 다른 팀 사람들에게 낯을 가리는 부분 외에는 팀이랑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것이 전부다.

지금도 늘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뜨뜻했어요.



지금 고용 관계를 맺고 있는 사장님이자, 직장 상사이자, 대표님은 대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처음 만났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교수님으로 부른다. 처음에 사제지간으로 만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교수님과의 고용 관계에는 이전과는 또 다른 결이 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교수님이 종종 던지시는 질문에 나타나 있다.

교수님은 일은 할만하니?라고 묻질 않으신다.

대신 생활은 괜찮니?라고 물으신다.

참 낯선 질문이다. 요즘 별 일 없니? 힘든 건 없니? 도 아닌, 생활은 괜찮니? 는.


네?라고 반문했더니,

지금 받는 임금 수준으로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말해- 하고 다시 물으셨다.

지금도 충분해요! 하고 허허 웃었는데, 무언가 새로운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이 질문의 특징은 일회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틈틈이 물으신다. 생활은 괜찮니? 하고.

이번 주 까지 써내야 하는 보고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일의 근황만 묻는 대신,

그 일을 하고 있는 주체인 나의 생계나 살림이 원활히 잘 꾸려지고 있는지에도 동시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거다.

왜 이 질문이 그토록 낯설고 새로웠는 지를 곰곰이 마주하고 있으니,

교수님 이외에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은 여태껏 딱 세 사람 정도였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 아빠 그리고 외할머니.


스스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던 나를 직접 업어 키워준 어른들만이 늘 나에게 그렇게 물으셨다.

요즘 생활이 어떠냐고. 제대로 먹고 잠은 잘 자고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느냐고.

고용 관계의 갑이 을에게 하기에는 심히 낯선 질문인 거다.

덕분에 상상해보았다.

내가 조금 더 어른이 되면, 언젠가 만약 누군가를 고용하여 일하게 되면 어떤 질문을 건넬 지를.

적어도. 지금 이딴 걸 먹으라고 만들었어?라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도 하고 말이다.


「어떤 강연을 갔는데 한 사회적 기업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냐'는 청중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는데,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반경 3미터까지가 자신의 문제의식이 닿는 곳이고, 그 문제의식을 3미터 밖의 세상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하더라.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내 일상의 반경 3미터를 기준으로 내가 지금 만들고 싶은 변화와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 변화를 모두 고민하고 같이 이야기하자는 제안. 그렇게 세상의 많은 점들이 모이면 세상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 홍진아,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조소담' 닷페이스 대표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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