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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Dec 06. 2019

무엇을 잘하느냐고 물으면요.

좋아하는 걸 잘합니다.

우리 좀 뜸해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보고 싶어 지는 이들 가운데 가장 시끄러운 무리는 단연코 강, 김, 남, 류, (송), 장, 추이다.

성도 제각각 성격은 더 제각각인 7명은 20살에 만나 서로의 치기 어리고 치열했던 날것의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 앉아 낄낄거리거나 투닥거리지 않으면 알레르기가 돋는 줄 알았던 때는 금방 지나갔다.

우리 동해 가자, 제주도 가자, 부산 가자, 면회 가자 같은 말을 하면서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달리던 시간은 좋았던 한 때, 요원한 과거가 되었다.


이제는 4명 이상 모이려면 한 두 달 전부터 시간을 잡아둬야 하는 사회인들이 된 지라,

때마다 강, 남, 류, 송의 모임이 되기도 하고

김, 남, 송, 장, 추 혹은 강, 김, 남, 류, 추의 모임이 되기도 한다.


그 날은 강, 김, 남, 류, 송이 모여 밥에서 커피로 커피에서 술로 종목을 바꿔가며 쉴 새 없이 떠들던 날이었다.


문득 김은 자신이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김이 뭘 잘하더라-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여 이런 말이 나왔다.


넌 착한 마음이 재능이야.


김은 아 그런 거 말고- 하며 어이없는 얼굴을 지어 보였지만, 아니 왜 꼭 재능이 성과나 수익으로 연결돼야 하냐며 나온 반문은  급기야 우리의 대화 주제를 서로의 성향적 재능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류의 재능은 호응력과 이해심 자체다. 그녀는 흐름을 깨지 않고 호응하는 리액션력과 상대에 대한 이해심을 타고났다.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기분에 연연하기보다는 전체를 생각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데 공을 들이는 드물고 귀한 사람이다.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예쁜 외모의 소유자이면서도 무대에 서는 대신 맨 앞줄에 앉아 눈을 반짝이며 상대를 바라봐주고 크게 박수 쳐주기에 여념 없는 사람도 세상에 있다는 걸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강은 축 쳐진 상대까지 들썩이게 만드는 밝고 솔직한 에너지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매특허 애교를 지녔다. 가끔 아무 이유 없이도 그녀가 참을 수 없게 보고 싶어 지는 날이 왕왕 있는데, 그녀 앞에서는 나도 한껏 솔직해질 수 있어서 숨통이 트이기 때문일까. 다짜고짜 전화해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가 펑펑 우는 나에게 무슨 일이냐 캐묻는 대신 더 크게 엉엉 따라 우는 친구가 있다는 건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는 일이란 걸 그녀가 알려주었다.


남은 매사에 공명정대하고 정확하며, 어렵고 불편하고 힘든 부분을 제대로 표현해내는 멋진 합리성과 이성을 가졌다. 나머지 여섯 명이 초감성적 충동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안 돼. 지지’ 하며 중심을 잡고 알람을 맞춰주는 든든한 사람. 그녀의 사전에 ‘그냥 해본 빈 말’이란 존재하지가 않아서  ‘갈게’, ‘할게’라는 자신의 말을 무조건 지키기 때문에 그녀는 친구들이 잠시나마 머물렀던 곳, 이를테면 말레이시아라던지, 태국이라던지, 제주도 같은 곳들을 모두 순회한 유일하고도 대단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보며 류, 강, 남, 김이 너는 말이야 라며 꺼낸 재능은 좋아하는 능력이었다.

8년 간 나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진짜 좋아. 너무 좋아. 어떻게 이렇게 좋지?” 같은 것이었다 했다. 좋은 것들은 친구였다가, 책이었다가, 작가였다가, 명상이었다가, 애인이었다가 했는데 그런 것들을 그토록 좋아하는 내가 참 신기해 보였다 했다. 뭐가 저렇게 많이도 좋을까 싶었다 했다.




지난 일요일 집으로 놀러 온 남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처음엔 넌 무슨 복이 있어서 주변에 좋은 사람만 있고, 배울 것들이랑 감사한 일들이 많을까- 생각했었거든. 네가 운이 좋아서 그렇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네가 상대의 좋은 걸 착즙하고 있는 거더라. 인간 휴롬인 거였어 네가.”


어쩐지 내가 좀 괜찮은 인간처럼 느껴졌다. 인간 휴롬이라니. 휴롬은 가진 즙을 최대한 짜내지만, 없는 즙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힘들이지 않고도 잘하는 게 뭔갈 좋아하는 거라면, 내 재능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일 터였다. 그 사람의 예뻐할 만한 구석을 발견하는 데 능한 사람.


그리고 뚜껑을 열어 보면 엉망진창인 휴롬이 된 기분이었다. 힘 안 들여도 잘 돌아간다 싶으니 자꾸 쓰게 되고, 자꾸자꾸 쓰면서 이것저것 넣어보고 용량에 비해 큰 것도 욱여넣고 그러느라 과부하가 걸린 휴롬.

이것도 되지 당연히 되지 안 될게 뭐 있어- 하며 내가 가진 힘을 과신하다, (당연하게도) 안 되니 힘이 빠져 전원을 뽑아 버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오작동의 오작동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고장나 버릴까 두렵다.


두렵지만 또 별 수 없다.

다시 오작동을 반복하고 내가 상대의 오작동이 되는 나날이 이어질 거다.

힘이 들어 한참을 작동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멈춰 있는 날도 많을 거다.

좋은 것들에 빠져 허우적대다 나와선 황망하게 얼굴을 비비다 기척이 나서 옆을 보니 거기 서 있는 누군가가 또 좋을 거다.


회사 근처 공원에서 곤히 자던 고양이, 망가진 신발 탓에 한껏 유치한 슬리퍼를 사 신고 나를 만나러 온 친구, 빠르게 달리던 택시가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올려다 본 하늘처럼.


“그거 퇴행입니다. 문제를 피하는 거죠. 제가 영화를 좀 봤지 않습니까? 경애씨, 요즘 날도 날이니까 그런 거 봐요. <에일리언>이나 <그렘린>이나 뭐 그런 것 있죠? 외부에서 온 생물체가 숙주 몸에서 커나가다가 죽게 하지 않습니까? 죽게 한다니까요? 결국 그렇게 착취하려는 것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조심해야 해요. 깜빡 속거든요. 경애씨가 좋아하는 그 프랑켄슈타인도 있잖아요. 은혜를 원수로 갚잖아요.”

“그런데 저 그런 영화 싫은데요. 뭐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갈려요. 그 단순한 생각이 퇴행이죠. 살면서 조금씩 안 부서지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무 사건 없이 산뜻하게 쿨하게 살자 싶지만 안되잖아요. 망하는 줄 알면서 선택하고,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부서지고. 상대를 괴물로 만들고 죄를 뒤집어씌워봤자 뭐해요?”

-김금희, <경애의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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