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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뽀끼 Oct 04. 2024

비 오는 날의 만찬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빗소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다. 아이와 함께 초겨울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구워 먹었던 고구마의 맛이 아직 생생하다. 창밖으로 내리는 빗방울은 여느 유튜브 채널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모두 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바다도, 계곡도, 구름도, 심지어 사람도 물이 70% 아니던가!


맘이 힘든 날엔 빗방울에 심하게 동화된다. 톡톡톡 빗소리를 따라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린다.

눈물샘 왈, "나 지금 좀 나가도 되니?"

평소 같으면 나를 재촉해 가며 공부를 하던가, 운동을 하던가 그도 아님 글이라도 쓰고 있을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잊었어?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마음속으로 백번도 더 날 다그치고 있었을 게 뻔하다. 하지만 이런 날엔 어떤 루틴도 소용없다. 유명한 스포츠 스타 누구누구는 기분이 안 좋은 날에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는데, 나는 그만한 그릇이 못된다. 그나마 늘리고 늘린 게 간장종지 수준.


냉장고로 간다. 꺼낼 수 있는 모든 반찬통에서 갖가지 반찬을 꺼내어 본다. 열무김치, 고사리, 콩나물 무침, 얼마 전 외삼촌네 텃밭에서 따온 깻잎과 상추도 몇 장씩 집어든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도 후다닥 부쳐낸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볼을 꺼내 흰쌀밥 한 주걱 크게 퍼 넣고 재료들을 모조리 담아준다. 여느 전주비빔밥 전문점 못지않게 나름 모양을 내고, 고추장 한 스푼과 참기름 두 바퀴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비빔밥은 젓가락으로 비비는 거라고? 성질 급한 한국인에게 그런 말은 통하질 않는다. 숟가락으로 팍팍 비벼줘야 제대로 섞이는 느낌이다. 밥알이 고루 빨개졌다면 참기름의 꼬순 냄새를 확인한다. 빗소리가 잘 들리는 창가 옆에 쪼그려 앉아

'잘 먹겠습니다.'

신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모든 재료와 그것들을 만들어 냈을 누군가를 향해 감사드린다.


내가 사두었지만 부모님은 잘 쓰지 않으시는, 그래서 칠도 멀쩡하고 제법 새것 같은 나무 숟가락으로 비빔밥을 한가득 크게 퍼 올려 입 속으로 골인한다. 열무김치가 아삭하게 씹히는 것이 제대로다. 고추장의 달달한 맛과 참기름의 고소한 향. 그렇다. 이게 바로 제일 무섭다는 그 아는 맛이다. 밖에선 빗방울이 토독 토독 터지고 있고, 내 입에선 열무김치가 아득 아득 씹히고 있다.


소화가 잘 안 되기 시작하면서 과식하는 걸 지양하고 있지만, 비가 오는 날엔 그럴 수 없지. 비빔밥 한 그릇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 빗소리를 들으면 내 위장도 마음의 준비를 한다. 비빔밥을 요리조리 옮겨가며 *디저트석을 마련한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마음만 굳게 먹으면 만들어지는 디저트용 VIP 좌석


애호박을 채칼로 잔뜩 썰어 놓고 부침가루를 살짝 개어 얇디얇은 애호박 부침을 지져본다. 냉장고에서 시원해진 막걸리도 한 병 딴 뒤 유리잔에 꼴꼴꼴 따라본다.

이게 디저트냐고? 물론이다. 얇게 부치면 팬케이크나 다름없다.  정말이지 막 구운 참치 타다끼보다 부드러워 씹어 삼킬 필요도 없다. 간장에 고춧가루 풀고 식초 몇 방울 떨어뜨린 매콤 상콤한 간장 양념장을 곁들이면 감칠맛이 두 배다. 위장으로 다이빙하는 호박들을 배웅하며 막걸리를 들이켠다. 귓속엔 빗소리 청하하고, 입안에선 감칠맛 폭발하니 맘도 편하고 기분도 좋다.

입맛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다이어트엔 영 도움이 안 되는 미각이지만 그 재미가 인생에 얼마나 큰 활력을 부여하는지 말이다. 내 인생에 입맛이 없어졌던 기억이라고는 이혼 후가 유일한데, 그게 바로 얼마 전이다. 그러니 이토록 즐거운 미식의 순간에 감사할 수밖에.


눈치 없는 스마트폰은 운동 나갈 시간이라며 대차게 알람을 울려댄다. 운동 역시 나의 만들어진 루틴들 중 하나이다. 엉덩이를 붙이고 오래 공부하다 보니 체력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던 거다. 걷기만 해도 좋다지만,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래도 집 밖을 싫어하는 데다 이혼 후 사람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꺼려져서 새벽시간이나 밤시간에만 슬쩍 나갔다 들어오곤 했다.

운동을 결심하고는

‘*따릉이라도 타고 동네 한 바퀴라도 돌고 오자’

며, 정기이용권을 구매했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질 않던가. 결제를 해버렸으니 타러 갈 수밖에.

*서울시 자전거, 정기이용권이 월에 5,000원.


되도록이면 주에 3일은 페달을 밟아보려 한다. 그런데 오늘 마침 비가 오네?

'아무래도 오늘은 패스해야겠지?'

이보다 훌륭한 핑곗거리가 없다. 빗길에 자전거만큼 위험한 게 없으므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본다. 막걸리의 기운을 빌려 잠시 모든 걸 잊게 되는 순간. 누구에게 피해 줄 일도 없으니 취해도 상관없다. 나 홀로 즐기는 진정한 만찬이 여기 이 집에 있다.

애를 쓰며 망가진 일상을 재건 중이다. 그러다 이따금 모든 장비를 내려놓는다. 내 삶을 고치느라 지나치게 애를 쓰면 나 자신을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이제 아니까. 루틴의 창조자로서 감히 명한다.


오늘은 그냥 쉬어!

쉬는데 이런저런 이유 가져다 붙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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