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헌 Jun 16. 2024

3년 8개월의 동거, 엄마와 보낸 한 시절의 단상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네가 언제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지?”

“3년후에요.”

“그때 떠나면 어떡하지?”

“엄마, 3년은 아주 길어요. 아직 멀었어요. 걱정말아요. 그때 생각해요.”


엄마집으로 들어간 첫 날밤부터 며칠 동안 엄마는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흔부터 12년을 혼자 사셨다. 남편의 해외근무를 이유로 나는 직장과 30분 통근을 포기하고 1시간 30분거리의 엄마집으로 들어갔다. 결혼후 엄마와 다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에게 못다한 효도를 엄마에게라도 대신하고 싶었다. 코로나가 정점이었다.


“엄마, 우리 서로에게 좋은 말과 칭찬만 하기로 해요. 잔소리는 안 돼요.” 엄마의 입이 조금 삐죽 나왔다. 

동거의 첫 번째 룰이었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집이란 물리적 공간은 무한한 편안함을 주는 의미가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부지가 안 해준 애정표현 제가 다 해드릴게요.“ 


이렇게 시작한 우리들의 3년8개월은 너무나 빨리 끝나버렸다. 서울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내 것과 같이 뒤섞여 있던 엄마의 물건들도 먼저를 털었다. TV 서랍장 안에는 색깔별로 말려있는 여려 개의 큰 실패, 뜨개질용 대바늘과 코바늘, 약 상자, 성경책, 엄마의 필사 노트. 내가 사준 동시집과 크레용, 크기가 다른 스케치북이 있었다. 물건에 시선이 닿자마자 이야기 상자가 하나씩 자동적으로 꿈틀거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같이 살면서 엄마가 처음 맞는 여든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관찰자의 입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치매약을 드시기 시작한 엄마는 산책을 나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것외에는 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 소파에서 뜨개질을 했다. 우리집의 모든 소품들에게 받침을 만들어 주었다. 차 주전자, 찻잔, 노트북, 텀블러, 컵, 어항, 테이블, 변기커버, 테이블, 수세미, 스푼 주머니까지 크기와 색깔, 모양도 다양했다. 언제부터 내 미션은 실을 주문하고, 엄마의 뜨개질 작품에 놀라움과 과한 찬사를 퍼부어 주는 일도 포함되었다. 


“엉마, 오늘은 이 동화책의 고양이를 그려보세요.”

“엄마, 오늘은 해수욕하는 할머니와 강아지를 그려봐요.”

“시골 할머니들이 마을에서 그림을 배우고 저렇게 예쁜 그림전시회를 열었대요. 엄마도 저 할머니들처럼 할 수 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 들어가는 몸의 반응을 놓칠래야 놓칠수가 없었다. 가스불 위의 음식이 타고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했고, 싱크앞에서 접시를 깨뜨렸다. 소파에서 일어나려면 세 번씩이나 엉덩이 바운싱을 해야헸다. 걷다 넘어져 종아리 골절로 3개월동안 깁스를 했고, 다시 넘어져 오른쪽 팔꿈치를 거의 갈다시피 피를 철철 흘리며 집에 왔다.


처음에 소파에 앉아지내던 엄마는 누워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식사량도 줄었고 잘 먹지 않으려고 했다. 몇 분동안 집중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어느 시점에 되자 기다린 것처럼 단어는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글자 단어를 생각해내려고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지만 결국 ‘그것’으로 나왔다. 한숨으로 터저나온 무력감이 엄마의 얼굴위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내 처방은 말보다 몸이었다. 자주 안아주고, 뺨을 포개어 비비고, 코를 부비는 따위로 감정을 받아주었다. 그러면서 여든이 처음이어서 몸이 아프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많이 속상하고 슬프고 우울해지기까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인 인구중 독거 노인비율이 21.1%이고고 여든이 넘어도 혼자 사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버렸지만 사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였다.


처음 여든이 되는 것은 심리적 지지와 격려, 관심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40에서 50이 되면서 흰머리가 늘고, 피부가 처지고, 기억력이 떨어지고 의욕이 예전과 같지 않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번 80이 넘어 처음 해보는 경험 앞에 속수무책이 되고만다는 것을 알았다.


3년이 지났고 엄마는 과거의 기억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요일과 숫자도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다. 다만 자식들과 보낸 아주 즐거운 기억들을 군데 군데 애절하게 붙들고 있었다. 오늘 아침 20여년 전에 감명깊게 봤던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rtless Mind(2004)”을 봤다. 클레멘타인은 연인인 조엘과 사랑했던 관계가 악화되자 기억 삭제 전문회사를 방문해서 함께했던 기억을 지워버린다. 조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상심에 빠져 기억을 지우는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즐거웠던 기억과 쓰라렸던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을 다시 경험하며,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들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결국 모든 기억이 지워졌지만 두 사람은 다시 끌리게되고 만나기로 한다.


떨어져 나가는 엄마의 기억들을 붙들기 위해 전 속력으로 쫓아가 보았지만 너무나 빨리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허망한 채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결국 내 기억 중 엄마의 등장 장면을 한 장 한 장 끄집어내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루브르 박물관의 성화앞에서 이야기를 풀어주어 나를 놀래키고, 늦게 결혼한다고 알렸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고, 아버지를 4년동안 온갖 정성으로 수발하고, 20대 늘 늦는 딸을 들어올 때 까지 기다려준  엄마, 고등학교 자취방으로 반찬을 날라다 주던 엄마가 있었다. 마지막 화면은 내가 다섯 살, 남동생을 임신하고 시골집 마루에서 할머니와 함께 나물을 다듬는 젊고 예쁜 엄마를 만났다. 시골마당 담장아래 엄마의 꽃밭은 꽃이 지지 않았다.


엄마와 보낸 한 시절로 엄마의 자리가 더 커져 버렸다. 독립적이고 남편에게 의존하기 싫어했고, 손재주가 많고 책임감이 강하고 쉽게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원칙주의자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나의 오십이 아니라 내 몸은 엄마의 여든 하나부터 여든 다섯이 새겨져 있다. 엄마 집을 떠난지 이틀이 지났다. 


“다시 태어난다면 부잣집 아가씨로 태어나고 싶어.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날거야.”

“엄마, 다시 태어나면 엄마를 끔찍이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세요. 그러길 바래요. 엄마, 꼭요. ”

이른 아침 경의선 숲길을 달렸다. 지워지고 있는 엄마의 기억은 어디쯤 도달했을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기쁨과 슬픔의 모든 기억이 사라져 티하나 없는 엄마 가슴에 자유, 순수와 행복의 영원한 햇빛이 내려앉길 바랬다.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