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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헌 May 12. 2024

민달팽이의 시간을 보내며

(질병편)


민달팽이의 시간을 보내며


아침 7시. 아파트 7층 헬쓰장에서 가볍게 운동을 하고  샤워후에 바로 앞 야외 수영장으로 간다. 호치민은 연중 더운 날씨때문에 대부분의 아파트에 야외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다. 아침 수영은 적당한 수온과 시원한 바람으로  최상의 컨디션으로 입수할 수 있다. 에너지를 모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힘을 빼고 오직 호흡에만 집중한다. 입을 조금 벌려 입주위의 근육도 풀어준다. 그리고 한 호흡을 마신다. 이어  내쉬는 호흡에 들어온 공기를 천천히 남김없이 내보내며 눈을 감는다. 이 순간 물에 저항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깨의 롤링, 팔돌리기나 발차기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오로지 내뱉는 호흡이 작은 물방울이 되어 천천히 사라질뿐이다. 물을 가르는 소리와 호흡소리뿐. 양 다리를 부드럽게 저어 나아간다. 마치 물속에서 하는 요가와 같다.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평영과 자유형을 30분 왕복해도 운동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피날레로 수영장 모서리의 화쓰 나무 그늘로 이동한다. 꽃나무밑에서 나뭇잎과 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양 다리를 앞으로 길게 뻗고 몸을 띄운다. 나무가지들 사이로 아파트 건물넘어 파란 하늘이 들어온다. 더 멀리 비상한 갈매기 조나단처럼 새들이 자유롭게 날개짓을 하고 있다.나무는 내 손바닥의 1.5배쯤 되는 나뭇잎들을 하나씩 버리면서 가지를 뻗어 나아가고 있다. 냐뭇잎과 거리를 두고 꽃들만을 위한 긴 꽃대 끝에 분홍색 봉오리와 만개한 꽃들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다. 기분좋은 현기증이 느껴진다. 눈을 감는다. 물이 넘치는 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밀려갔다 다가오는 듯 하다. 몸이 네게 말을 걸어온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야. 아주 편안해.

지난 시간들은 어쩔 수 없쟎아, 어쩌겠어."


지난 6월 건강검진때 담당의는 담낭이 결석으로 가득 차있어 기능을 상실했다면서 절제를 권유했다.  담도로 결석이 튀어나오는 경우 2차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중병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50대면 나타난다는 몸의 이상 징후를 어느날 이렇게 무방비 습격으로 당하는 구나 생각했다. 처음 맞는 50대를 몸부터 챙기라는 세찬 신고식같았다.  정신에게는 늘 사과하고 위안해주면서도 몸에 대해서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음식으로 자해하듯 폭식을 했다. 가빴던 호흡, 긴장, 불안, 두려움은 내일 다시 출근헤야 한다는 명분으로 어둠과 함께 무의식아래로 떨어져 봉해져 버렸다. 그러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스스로 봉인을 해제해버리고 에상치 못한 날카로운 공격 한방으로 나를 넉다운시키기도 했다.  몇분후 눈을 뜬 순간 사람들이 빙둘러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의 습격은 예고된 것처럼 퇴직후에는 남편마저 공격하였다. "자기야. 어떡해. 얼굴마비가 다시 왔어.". 감정을 표현하고 주름 하나로 그 사람의 매력이 담겨져 있는 눈, 코, 입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의 귀여운 인상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표현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것. 상대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것. 우리는 몸에 어떤 잘못을 한 걸까?


몸은 정신보다 더 정확하다. 위험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다. 결코 오작동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몸의 작은 신호들을 무시한 결과일 뿐이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암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는 데도 그 일은 내 사건이 아니며 영원히 살것 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에서 삼십 대 후반 사십대 초중반은 많은 직장인들에게 가장 힘겹고 버거운 시간이다. 높은 업무강도, 장시간 노동, 휴식부족과 더불어 새벽 두시경이면 마주하는 초침소리, 술로 잊어버린다고 해도 역시 다음날 성실성과 책임감의 그림자안에 다시 포획되어 헤어나올 수 조차 없는 몸부림의 자해는 중단될 수 없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운좋게 폭풍이 사라지는 것을 해피엔딩처럼 바라보고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망가져 상처만을 안고 퇴장해야 할 수도 있다. 사람은 쉽게 잊혀지고 그 자리는 공백없이 돌아간다. 그나마 고된 노동과 시간을 맞바꾼 경제적 여유를 챙기며 이제 그만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다고 읊조린다. 그리고 혼자말처럼 되뇌일 것이다. 삼십여년전 같은 배를 탄 몇백명의 동료들중 달랑 남은 몇십명의 무리에 내가 있는 것이라고. 그만하면 충분치 않느냐고. 일요일 오후, 휴가를 마치고 서둘러 귀경하는 차들을 보며 이제 나는 그들을 보내면서 통쾌하게 하행선을 선택할 수 있고, 머물고 싶은 장소를 발견하면 구애받지 않고 존재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다고.


몸에게 미안하고 속상하지만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씁쓸하지만 '몸에 이로운' 지혜로운 직장생활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의지이건 운명이건 시간의 소용돌이를 거치고 난 다음 누구나 강의 상류에서 중류를 지나 하류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속도만이라도 늦출 수 있는 방법들을 눈에 불을 밝히면서 찾고자 하는지 모른다. 급류인지도 모르고 통과했던 시간들의 흔적은 부메랑이 되어 어느날 슬픔으로 번진 몸과 마주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민달팽이의 상처의 시간을 보듬어야 한다. 그 연약한 살덩이에 가해진 수많은 폭력에 저항하느라 내쉬어야 했던 한숨과 딱딱하게 굳어진 피부에 부드러운 숨결을 불어넣어 위로해주어야 한다. 좋은 식단, 식습관, 운동법, 스트레스 조절법, 타자들과의 관계법을 점검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며 물어야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수영장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29층으로 올라간다. 거울안의 내가 웃는다. "다 지나왔쟎아. 두려울게 뭐가 더 있겠어! 이제 사랑하는 시간만이 있을 뿐, 그것이 무엇이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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