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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모스 Sep 26. 2022

"네가 그걸 하면, 오빠는 어떡하니?"

어릴 때 악기를 전공하려 했다. 중학교 때 방과후로 국악을 배웠는데, 나름 국악 특화 지역이라 지역 내 국악관현악단 단원들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수업을 시작하고서 얼마 안 돼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본격적으로 레슨을 받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엄마는 "선생님들 돈벌이 하려고 그러는 것"이라며 묵살했다. 첫 수업에서 악기 소리를 낸 건 내가 유일하다는 점도, 같이 악기로 수업을 들었던 친구들 중 나에게만 그런 제안했다는 것도, 엄마는 신경쓰려 하지 않는 거 같았다. 


이후 중학교 2학년 때 레슨을 해주시는 단원 선생님이 바뀌었는데, 그 선생님도 나에게 똑같은 제안을 하셨다. 선생님은 본인이 졸업했다는 국립국악고를 언급하면서 "학비도 무료고, 대학 진학도 나쁘지 않으니 한 번 고려해보라"고 했다. 이번엔 내가 더 하고 싶었다. 결국 조르고 졸라 레슨을 시작하고, 국악고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레슨은 채 1년을 하지 못했다. 결국 돈 때문이었다. (참고로 나와 함께 전공 레슨을 받았던 한 학년 위의 언니와 아래 후배는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해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국악고는 국악중에서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입학을 했는데, 일반 중학교에서 가려면 모집 정원 자체가 1, 2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레슨 선생님은 나에게 국악중과 국악고에 출강을 하는 지인을 소개해주셨다. 서울로 레슨을 다녀야 했던 거다. 가뜩이나 돈 때문에 레슨비를 달라고 할 때마다 눈치가 보였는데, 서울로 레슨을 가야 한다고 하니 당연히 엄마는 질색을 하며 본격적으로 내가 포기를 해야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때 느낀 절망감은 지금도 가늠이 안된다. 이후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때 만큼 죽고 싶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엄마는 당시 나에게 "지금이야 무리해서 널 가르쳐도,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갔을 때 뒷바라지 할 자신이 없다"면서 "오빠도 이제 본격적으로 대학 입시 때문에 돈이 들어가는 데 너만 악기 하면서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주변에 친인척 중에 음악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며 "네가 악기를 지금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엄마 아빠가 똑똑하게 낳아줬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던 거 같다. 웃긴 게 지금 엄마의 조카 중 한 명이 굉장히 유명한 가수라는 거다. 직접 작사작곡을 하고, 내놓는 음반마다 음원차트 1위에 오른다. 그 아이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 가수로 성공하는 걸 봤으면 엄마의 선택은 달랐을까.


'엄마는 왜 날 낳았나. 자식이 하고 싶다는 거 다 뒷바라지도 못해줄 거 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방에서 밤낮으로 일하며 우리 남매 잘 키워보겠다고 하는 엄마, 아빠의 노력을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물론 그때의 트라우마로 난 아이를 하나 이상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적어도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걸 부모의 이유 때문에 포기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악을 포기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내신은 우수한 편이었다. 국악고가 내신을 많이 보기도 했고, 악기 한다고 내신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더 독하게 한 덕분이었다. 


그때 친구가 다른 지역의 유명한 고등학교에 같이 진학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다만 해당 고등학교가 특수목적고등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근 지역으로 전학을 가야했다. 이번엔 가능할 거 같았다. 엄마는 나한테 미안할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또 반대했다. 


"오빠도 그 학교 가고 싶다고 했는데, 안보내줬어. 어떻게 널 보내겠니"


속으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난 전교 1, 2등의 석차였고, 오빠는 반에서 4~5등이었다. 더욱이 난 엄마 때문에 진로를 바꿨는데, 또 좌절해야 하다니. 


이후 엄마가 제안한 건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하는 외고나 과고,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진학이었다. 붙으면 더이상 막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속에 불이 나 있는데, 시험 준비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오래 전부터 특목고 진학만 준비하며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입시를 준비한 아이들과 대결이 될 리가 없지 않나. 결국 나보다 전교 석차가 낮은 친구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 특목고나 자사고에 진학했지만 난 지역 고등학교에 갔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어쨋든 막판에 특목고 입시 준비는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도 크니까. 


입시를 준비하면서 같이 스터디를 하던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에 다녔다. 다들 열심히 했는데, 난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짜증나는 상황에 해리포터에 빠졌다. 시험 준비만 해도 모자란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해리포터 시리즈만 빌려 읽었다. 그땐 해리포터를 보느라 원하는 학교에 못갔지만, 해리포터 덕후가 된 나는 그 힘으로 지금까지 밥벌이까지 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팠다. 엄마 때문에 아팠고, 아팠던 기억 역시 지금까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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