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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 부부의 5월

by 김호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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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회계법인에 다니는 회계사는 대부분 근로소득을 받으니 공식적으로는 쉴 수 있는 날이다. 하지만 회계사는 계약 관계에서 '을', '병', '정' 중에 하나여서 고객사 일정에 따라 못 쉬기도 한다. 내가 대형 회계법인 (빅펌)에 다닐 적에 맡았던 고객사의 일정은 항상 5월 초에 밀려있었다. 그래서 연휴에 텅텅 빈 고객사 사무실로 출근해야 했다.


어느 어린이날 전, 박이사님이 내게 물었다.

"내일 오전 11시에 모일까, 오후 1시에 모일까?"

팀에서 유일한 90년대생이던 나에게 선택권을 주며, 젊은 꼰대라는 말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집에 어린이도 있으신데, 점심 식사하고 오후 2시에 모이시죠."

일찍 모인다고 일찍 파하지 않는다. 꼭 모여서 해야 하는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날 약속된 시간에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이미 와서 일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박이사님은 딸바보인데 그 해 어린이날을 그렇게 보내도 되었던 건가? 어린이날 기념 나들이를 미리 했다고 했지만 그래도 딸이랑 놀고 싶었을 텐데. 아마 그날 제일 출근하기 싫었던 사람은 박이사님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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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후 두 번째 5월, 동기들의 일정은 나보다 일주일 빨랐다. 그들은 연휴 전까지 야근을 해서 마쳐놓고 쉴 수 있었고 이때 엠티를 가려고 계획 중이었다. 나는 '나만 빼고 노는 건 못 참는다'며 동기들과 춘천에서 밤새 놀고 새벽 첫차를 타고 돌아와 출근한 적이 있다. 놀 체력은 무한대이던 20대 중반, 그렇게라도 놀아야 했던 불나방이던 때가 있었다.


남편은 아직도 빅펌에 다니면서 불나방 같은 스탭들을 데리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작년 연휴에 출근을 앞두고 근교 카페에 앉아있는데, 남편에게 뉴스탭의 전화가 걸려왔다. 뉴스탭이 휴일에 전화할 일은 없는데. 들어보니 스탭이 연휴에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못 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일 출근을 못 할 수도 있다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아는 상식과 요즘 상식이 좀 많이 다른가? 요즘 애들은 책임감이 없다, 출근을 앞두고 편도행 티켓이 말이 되냐는 등 나는 남편보다 더 불평을 늘어놓았다. 박이사님이 이 모습을 봤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그때 그 90년대생이 이렇게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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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6월까지 연차 휴가를 모두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돈으로 보상받지 못하고 연차가 사라진다. 남편은 1년 동안 연차를 한 번도 쓰지 않아서 (못해서) 5월 중순에 반기검토보고서를 끝내자마자 6월 말까지 총 18일을 사용해야 했다. 남편이 1년 내내 바빠 휴가를 못 쓴 건 안타깝지만, 일단 당장 같이 놀 수 있는 평일이 18일이나 생겼다. 야호!


남편이 쉴 수 있으면 나도 99% 쉴 수 있다. 내가 다니는 중소 회계법인 (로컬)에도 법적으로 연차 제도가 있긴 하지만, 일이 있으면 주말에도 일하고 없으면 노는 게 기본 방식이다. 남편이 한창 보고서를 준비하는 중에 연차를 쓰지는 않으니까, 남편만 휴가를 내면 나는 언제든 맞출 수 있다.


남편과 같은 법인에 다닐 때는 휴가를 맞춰서 쓰곤 했다. 동일 업종에 있으니 여유 있는 때가 비슷해서 같이 쉴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다만 그러면 사내연애를 들킬 염려가 있었다. 감사본부에는 누가 언제, 어느 고객사에 배치되었는지 볼 수 있는 연간 일정표가 있어서 의심되는 두 사람의 일정을 동시에 조회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들킬 대로 들킨 상태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비밀 연애 중이던 동료 커플은 휴가 며칠은 일부러 어긋나게 내거나 한 명은 사내 메신저를 켜서 일하는 척을 했다고 한다.


남편이 이렇게 길게 휴가를 쓴 적이 처음이어서, 나는 멀리 유럽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빅펌의 시니어매니저는 휴가여도 언제, 누구에게 연락올 지 모른다. 그래서 남편은 장기간 해외에 있는 게 불안하다고 했다. 게다가 그가 담당한 고객사가 법인 내부 심리 대상일 가능성이 높아서, 심리 발표가 될 때까지 항시 대기 상태여야 한다고 했다. 내가 빅펌에서 스탭일 때 박이사님도 내부 심리에 걸리는 바람에 태국행 가족여행을 취소한 적이 있다. 이게 빅펌 회계사의 아내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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