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 커리어의 끝은 개업이라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사무실을 연다고 바로 고객이 생기진 않는다. 영업이 필요하다. 동네 미용실과 비슷하다. 아무리 최신형 염색약을 들여놓고 사장님이 온갖 대회에서 상을 휩쓸어도 손님이 저절로 늘진 않는다. 전단지를 돌리고, SNS에 광고를 올리고, 개업 선착순 할인 정도는 해야 "여기도 미용실이 생겼네"하며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영업이라 하면 흔히 술자리나 골프를 떠올린다. 휴, 그렇게만 해도 일이 성사된다면 걱정이 없겠다. 아무리 밥을 사고 라운딩을 나가도, 그 회계팀장님 주변에는 나 같은 회계사가 한두 명이 아니리라. 혹시라도 아는 회계사가 나뿐이라 해도, 친한 것과 일을 맡기는 건 다른 얘기다.
다시 미용실을 예로 들면, 나는 결혼 전 살던 동네에서 찾은 작은 미용실을 지금 4년 넘게 다니고 있다. 그리고 친한 친구가 미용실을 연다고 해서 단골 미용실을 쉽게 옮기지는 않을 것 같다. 응원차 한두 번은 가겠지만, 거리가 멀다는 핑계를 대며 원래 다니던 곳을 고수할 것 같다. 단골 사장님은 내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내 머리에 맞는 염색약 배합이 무엇인지, 머리숱을 얼마나 쳐야 하는지 알고 있다. 커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바로 AS를 요청하기도 한다. 친구였다면, 자존심을 건드릴까 조심해서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친하다고 해서 내 머리를, 회사 일을 턱 맡기게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나에게는 친한 사장님도, 회계팀장님도 없다. 하지만 회계사 동료들은 있다. 같은 업계에 있으니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하는 경쟁자가 될 수도 있지만, 서로 어느 법인에 소속되어 있는지, 주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에 따라 공생 관계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독립성 규정 때문에 한쪽이 못 하는 일을 다른 쪽에 소개해줄 수 있다. 그래서 회계사들끼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독립성 때문에 못 하는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라고 인사할 때가 있다.
독립성에 위반되는 일은 아예 계약을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회사의 재무제표 작성 용역을 하는 법인은 그 회사의 회계감사를 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회사가 장부 쓰는 걸 도와줬으면 그 장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거다. 덕분에 내 친한 회계사가 감사인인 고객사가 용역 법인을 찾을 때 친구가 나를 추천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흔쾌히 소개해주기가 쉽지 않다. 소개팅을 주선할 때를 떠올려보면 된다. 내 명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친구를 실망시키지도 않고, 소개받는 상대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영업도 마찬가지다. 내가 똑똑하고 성실하게 일처리를 해야 하고, 고객이 악성 회사가 아니어야 하며, 계약 금액 수준도 맞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회계사 친구가 많은 것처럼 그 친구 또한 다른 회계사 친구가 많다. 결국 인맥 하나로 승부를 보기는 어렵다.
대형 법인에 다닐 때 상무님, 이사님이 회식 때마다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어디서든 맡은 일을 성실히 하고 호의를 베풀면, 언젠가 그게 다 돌아온다." 그때는 그냥 잔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잔소리 중에 틀린 말은 없다. 영업을 따로 뛰지 않아도, 내가 쌓아온 평판이 자연스러운 자기 PR이 되더라.
예전에 맡은 거래처에서 내가 좋은 인상을 남겼다면, 담당 대리님이 "아는 회계사한테 용역 견적 좀 받아와."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나를 떠올려줄 수 있다. 물론 간간히 안부 연락도 하고, 그 대리가 진급해서 발언권이 생겨야 더 수월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모르는 사이 뿌려놓은 씨앗이 자라 기회가 되기도 한다.
결국 인맥이 영업의 시작은 맞지만 끝은 아니다.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 명함을 돌리고, 유튜브나 SNS에서 자신을 알린다. 성실하고 전문적이면서도 신뢰할 만하고, 동시에 친근한 회계사라는 사실을 열심히 보여주려 한다. 영업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결국 내가 어떻게 일하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