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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드 Mar 15. 2022

지겨움에 관하여

반대말은 그리움이려나

 '지겹다'의 사전적 의미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루하고 싫다'이다. '넌더리'는 '지긋지긋하게 몹시 싫은 생각'이라고 하고. 문득 지겨움이라는 단어가 갖는 스펙트럼이 꽤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뜻이 무엇이든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하는건 분명한것 같다.


 내게 가장 큰 지겨움의 체험은 첫 직장생활이었다. 신입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8년동안 같은 업무를 하던 끝에 내 입에 붙은 말은 바로 '지겨워'였다. 하루에도 몇번이나 그 말을 내뱉으며 같은 장소를 오가며 비슷한 내용의 자료를 만들었다. 비슷한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고만고만한 성장을 이어가는게 더는 참기 힘들어 떠나기로 했고, 몇 해가 지난 지금은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업무를 하고 있지만, 가끔 그때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자료를 만들땐 나도 모르게 손이 빨라지고 눈에 총기가 돈다. 그러면서 문득 그때가 즐거웠다, 재밌었다 하는 그리움이 들기도한다. 


 가끔 아직 거기에 남아 있는 후배에게 연락해보곤 하는데, 어느날 후배는 내가 맨날 지겹다면서 올려다보던 사무실 천장을 찍어 보내줬다. 너무나 익숙한 천장. 일하다가 한숨이 나오면 그대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지겹다 지겹다' 되뇌이던 그 수많은 날들. 나도 지금 사무실의 천장을 찍어 보내주며 사무실 천장은 다 비슷한가보다고 했다. 그때가 재밌었다, 그립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가진 말과 함께.


 무엇이든 익숙해지고 반복되면 지겨워진다. 사실 오랜 수험에 지쳐있던 내게 첫 직장은 벼랑끝에 있던 나를 구해준 곳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인생을 구원받았다는 얘기도 곧잘 했었는데, 어느새 그곳은 내게 지겨움의 표본이 되버렸다. 함께 일하는 또래의 동료가 많았고, 나름 인정받으며 일했으니 고단했지만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일이 익숙해지고 다른 진전이 없는건 견디기 힘들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게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 긴 수험생활에서 익힌 지식으로 밥벌이를 하고 첫 회사에서 지겹도록 만들던 자료와 비슷한 것을 만들때 내 눈은 초롱초롱해진다. 지겨웠지만 남들보다 익숙하고 능숙했으니까. 그래서 지겹지만 그립다고 느끼는것 같다.


 다행히 이직 후 회사생활의 강도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져 더 이상 회사생활에서 고단함을 많이 느끼진 않지만, 요즘은 육아를 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한다. 


 퇴근이 이른 내가 보통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는데, 일정한 하원 후 루틴이 있다. 선생님께 인사를 잘 하는지 지켜보고 안하면 인사를 시킨다. 하원하고 나와서 놀이터, 마트, 빵집을 가겠다는 아이를 차근차근 이유를 들어 집으로 데리고 간다. 일찍 하원하거나 날씨가 좋은날은 놀이터에 간다. 집에 와서는 마스크와 신발, 옷을 벗고 손을씻고 벗어놓은 옷을 정리하고 세탁기에 넣고 아이를 구슬러 욕조에 넣고 어린이집 가방에서 물통과 수저통을 꺼내 싱크대에 넣는다. 아이에게 목욕할건지를 묻고 씻기고 나와서 타월로 물기를 닦고, 크림을 온몸에 바르고 옷을 입힌다. 여기까지 하면 어지간히 진이 빠진다. 이제 밥을 차릴 시간이다. 밥솥에 밥이 없으면 쌀을 씻어 안치고 반찬을 만든다. 아이것은 따로만들고 싱크대 앞에서 뚝딱거리다보면 아내가 퇴근을 한다. 아내도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셋이 앉아서 식사를 한다. 스스로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를 구슬러가며 아내는 본인입과 아이입에 밥을 떠넣고 다 먹고나면 설거지를 한다. 아이와 놀거나 같이 티비를 보면서 빨래를 개고 양가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한 뒤, 10시쯤 모든 불을 끄고 침대로 간다. 아이를 재우고 무언가를 하고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 모두 같이 잠이든다.


 이건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고 퇴근하고 지친몸으로 하기엔 꽤 지치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지겨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무언가 많이 부족하다. 힘들고 지친데 또 매 순간 즐겁다. 수험과 회사에서 지겹던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마 아이에 대한 일이니까 그걸 지겨움이라고 표현하지 못하는 터부일까. 그보다는 기쁨과 환희, 지겨움과 그리움이 매순간 공존하는게 육아아닐까.


 그래서 그 차이점이 뭔지를 알고 지겨움을 이겨내자. 라는 말을 하고싶은건 아니다. 지겨운건 지겨운거다. 다만 그 지겨움도 사라지고나면 그리워진다는 말을 하고싶었던거다. 학창시절의 내가 너무나 그리워서 다시 한번 주어진다면 더 즐겁고 멋지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것만 같고, 그 지겨웠던 회사에서 동료들과 좀 더 즐겁게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어쨋든 지나간건 그리워지기 마련이고, 나는 현재에 조금 더 충실하며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지금의 모든건 미래에 또 그리운 것이 될테니까.


 김훈 작가는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 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거 잊지말고 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아무 도리 없다.

라고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왜 이토록 고단하게 일해야하는지 노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만, '대책이 없다'는 말처럼 현재는 지겨워도 꾸역꾸역 할 수 밖에 없는게 있다. 다만,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라는 말로 위로한다.


 굉장히 상투적이고 촌스럽지만 우리 부부는 가끔 '오늘도 화이팅'이라는 말로 서로의 하루를 응원한다. '지겹고 고단하겠지만 서로를 위해 오늘도 힘을 내자'는 의미의 '오늘도 화이팅'.


오늘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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