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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Dec 03. 2024

귀에 착착 감기는 2시간짜리 플레이리스트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2017)> 리뷰

베이비 드라이버 메인 포스터. /이미지: 네이버

들어가며


좋아하는 음악들을 한 데 모아놓고 재생목록(플레이리스트)을 만들어 듣는 분들이라면, 그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 훌쩍 달아나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 그리고 직장인들이 플레이리스트를 구성하는 데에 공을 들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음악들과 함께라면, 힘들고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효율성이 저하된다는 단점이야 있겠지만, 고통을 즐거움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장점은 어마무시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오늘의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는 마치 잘 구성된 2시간짜리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것 같은 작품이다. 격렬한 힙합과 락, 부드러운 블루스와 재즈, 때로는 달콤한 러브송으로 구성된 리듬감이 넘치는, 그래서 끝날 때까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그런 플레이리스트.


주인공 '베이비'는 천부적인 운전 솜씨를 타고났지만 사고로 얻은 귀울음 때문에 거의 언제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사는 인물이다. /사진: 네이버

이 영화, 오프닝부터 리듬을 탄다


우선 간략한 스토리는 이렇다.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잠시라도 음악을 듣지 않으면 일종의 장애인 '귀울음'(이명증, 귀에서 울리거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증상)이 심해지는 주인공 '베이비'(안셀 엘고트). 천부적인 운전 솜씨를 타고 난 그는 실수로 범죄 조직 두목의 차를 털다가 꼬리를 잡힌 이후 금고강도단을 도주시키는 운전사로 이용당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글로 접하면 자칫 '어두운 영화겠거니' 싶겠지만,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주인공이 언제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는 설정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이용한다. 


오프닝 타이틀(영화의 제목이 나오는 장면으로, '타이틀 시퀀스'라고도 불린다) 이후 베이비가 커피를 사서 조직에 합류하는 장면이 백미인데, 단지 배경음악을 깔아 분위기를 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 내 거의 모든 요소를 활용해 리듬을 타고, 박자를 맞추며 시청각적 쾌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베이비가 음악의 리듬에 맞춰 걷는 템포를 유지하고, 가사에 나오는 타이밍에 그 단어가 적힌 벽을 지나치거나, 트럼펫이 나오는 씬에서는 부는 흉내를 낸다든가 하는 것이 그 예시.


영화 첫 추격전에 사용되는 스바루 임프레자 WRX 리미티드 2006 모델. 임프레자의 2세대 스포츠 모델로, 최상위 트림에 해당한다. /사진: 네이버

베이비의 신출귀몰한 운전 실력이 돋보이는 카 체이싱 장면에서는 격렬하게, 일상적인 장면에서는 재지(Jazzy)하고 블루지한 사운드 트랙이 분위기를 잡는다. 특히 결말 부분에 시작되는 추격전에서는 정말 전에 없던 전율을 느낄 수 있다. 시종일관 강렬한 템포를 이어가는 영화인 만큼 관객 입장에서는 '이 이상의 뭔가는 없겠지' 싶은 생각이 들 법한 순간에 영화 내의 급박한 상황, 그리고 한 층 격렬함이 더해진 음악이 2단 부스트를 건다(그래서 자칫 실례가 될 법한 상황임에도 무의식적으로 발을 쿵쿵 구르며 몰입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음악의 쓰임새 덕분에 보는 내내 짜릿하고 흥겹지만, 루즈해지는 순간이 전혀 없었다. 러닝타임 내내 음악이 나오는 데도 이에 대한 피로감보다 즐거움이 크다니, 정말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보는 이들 대부분이 리듬을 타다 나도 모르게 영화에 젖어들고, 에드가 라이트가 얼마나 음악에 진심이고 조예가 깊은지 절로 알게 되는 경험을 했으리라. (오죽하면 엔딩 크레디트에서 영화에 담긴 음악을 나열하는 페이지만 4개인데, 그도 그럴 것이 30개 이상의 사운드 트랙이 삽입됐다.)


(왼쪽부터) 행동대장 '버디'(존 햄), 리더 '박사'(케빈 스페이시), '배츠'(제이미 폭스). 영화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세 사람의 치열한 연기 대결도 볼거리다. /사진: 네이버

일말의 지루함마저 영리하게 덜어내는


하지만 <베이비 드라이버>는 이러한 '음악의 위대함'에 마냥 기대는 무책임한 영화가 아니다. 관객이 특정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느끼게 될 감정을 정확히 알고, 그를 극대화하기 위해 몇 가지의 장치들을 꼼꼼하게 배치해 지루함을 사전에 방지하는 영리한 모습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조직의 리더, '박사'(케빈 스페이시)가 조직원들에게 범죄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구간을 스킵한 방식. 장르의 특성상 모종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관객에게도 반드시 이를 설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자칫 흐름이 늘어질 수 있고 심할 경우 클리셰*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만큼 이를 실행하는 과정만큼이나 깔끔하게 다뤄져야 한다.


*클리셰(cliché): 남용의 결과, 의도된 힘이나 새로움이 없어진 진부한 상투구, 상투어·표현·개념. /출처: 위키백과


'베이비'는 어린 시절 사고로 생긴 귀울음을 이겨내기 위해 항상 음악을 들어야 하는 캐릭터다. 때문에 의사소통이 서툴고, 이를 피하고자 선글라스를 쓴다. /사진: 네이버

그리고 이 영화는 박사가 설명을 할 때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베이비의 시점으로 관객을 이동시켜 이 구간을 단숨에 건너뛰어 버린다. 우리는 그저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으로 음악이나 들으면서, 그 너머로 띄엄띄엄 들리는 박사의 설명만 들으면 된다. 나머지 디테일한 부분은 베이비가 찰떡같이 알아들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런 베이비의 행동이 다른 조직원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범주에서 이뤄지는 만큼, 관객 입장에서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도 매우 영리한 연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이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초반부에 불안 요소를 심어놓고, 이를 점점 키워 후반부에 큰 갈등으로 꽃 피우는 것 역시 이 영화가 가장 잘 한 부분 중 하나.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항상 스치기만 했던 내 타입의 그녀, '데보라'와 만난 베이비. 둘은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끌림을 느낀다. /사진: 네이버

'킥'이 돼주는 로맨스 & 성장 드라마적 요소


<베이비 드라이버>를 다채롭게 만드는 것이 비단 음악뿐만은 아니다. 사랑을 하게 되며 지켜야만 할 누군가가 생긴 '소년' 베이비가 '맨(남자)'으로 변하는, 일종의 성장물적인 스토리 요소가 강렬한 액션과 음악 일변도로 이어지던 영화에 변주를 주기 때문이다. 액션 영화에서 로맨스라는 요소가 초중반에는 브레이크, 후반에는 엔진으로써 영화를 끌고 나가는 요소로 잘 활용된 케이스.


본디 귀울음으로 인해 말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 방식이 서툴어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애니메이션의 대사를 그대로 가져와 써먹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던 베이비. 그러던 그가 우연히 들어간 식당 점원 '데보라'(릴리 제임스)에게 첫눈에 반해 점점 말수가 늘고, '무서운 형님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멋진 남자로 성장하게 되는 스토리는 관객에게 소소한 재미로, 후반부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극을 짜임새 있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한다. 초반에는 그저 샌님일 뿐이었던 베이비가, 극의 마지막에 다다라 상남자로 변하는 것이 갑작스럽기보다 개연성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왼쪽부터) '베이비'(안셀 엘고트), '뱃츠'(제이미 폭스), '달링'(에이사 곤살레스), '버디'(존 햄). 묵직한 조연급들의 연기 대결이 꽤 볼만하다. /사진: 네이버

약간의 아쉬움도 탄탄한 조연진들이 메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만점짜리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 답하겠다. 특히 베이비라는 캐릭터가 귀울음을 가지고 있는 것치곤 다소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는, 마치 '선택적 귀울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적지 않은 데다, 결말부에 다소 일이 손쉽게 풀리며 마무리가 너무 순탄했던 점 역시 누군가에게는 아쉬울 법한 포인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다소 '클리셰'스러운 부분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다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이 끊기지 않게끔 이어가는 연출력이나 깔끔한 끝맺음이 워낙 돋보이는 만큼 위의 아쉬움들은 다소 참작이 되는 편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범죄 조직의 수뇌인 '박사' 케빈 스페이시를 비롯해 존 햄(버디 역), 에이사 곤잘레스(달링 역) 등 굵직한 조연진들 역시 약간은 성길 수 있었던 스토리의 이음매를 훌륭하게 메웠다고 본다. 특히 제이미 폭스(배츠 역)의 존재감이 돋보이는데, 원체 선 굵은 캐릭터를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선악 여부에 따라 아주 유연하게 그를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배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개인적으로 한국 배우 중 황정민이 떠올랐다).


베이비 드라이버 포스터. /이미지: 네이버

팝콘 무비도 이 정도면 예술, 인정!


액션 영화의 탈을 쓴 음악 영화, 그리고 범죄 스릴러에 빈 틈 없이 음악을 덧칠해 오락의 정점에 닿게 만든 영화. 


누군가에게 <베이비 드라이버>라는 작품을 소개하라면 이렇게 하고 싶을 것 같다. 많은 이들이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1995)>의 총격 액션을 예술이라 칭했듯, 이 영화 역시 오락 영화로서 어느 정도 예술의 반열에 올라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을 순 있지만, 결이 달라도 예술은 예술이니까. 


그러니 끝내주는 액션물을 보고 싶다면, 특히 자신이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면 관람을 추천드리고 싶다. 되도록 사운드가 빵빵한 공간에서, 예를 들면 돌비 애트모스처럼 음향에 강점이 있는 영화관에서 재개봉한다면 무조건 가서 보시길. 영화에 나오는 사운드트랙들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거나, 시끄러운 것 자체에 대한 피로감이 큰 분들을 제외한다면 2시간동안 제대로 리듬을 타는 경험을 하게 되실 것이다. 



별점: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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