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이 깊어지는 가마쿠라의 절, 하세데라
혼자서 도쿄여행, 둘째 날의 시작이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이라면 캐치하셨겠지만 지금 시각은 오후 12시 21분으로 다소 늦은 출발이다. 해가 중천.
도쿄에서 1시간 반 가량 떨어져 있는 근교 지역, '가마쿠라'로 여행을 떠나는 날 치고는 상당히 늦게 일정을 시작한 셈인데, 첫날부터 이어진 강행군과 애초에 감기로 좋지 못했던 컨디션을 고려해 다소 여유롭게 나왔음을 양해해 주시길.
금강산도 식후경이니만큼, 우선 점심을 먹고자 긴시쵸역 근처 작은 라멘집 '한 라멘야'(漢ラーメン 室)에 들렀다. 식권을 뽑고 직원분께 면의 익힘 정도, 맛의 농도, 기름의 양, 밥 제공 여부를 말씀드리면 되는데, 일본어를 잘 모르시거나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면 그냥 "젠부 후쯔우데 오네가이시마스"(전부 보통으로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면 끝. "고항와?"(밥은요?)라고 물으면 그냥 "오네가이시마스" 하시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특제라멘(1000엔). 돈코츠와 쇼유, 시오라멘의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묘한 국물맛이 특징인데, 맛이 엄청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 데나 들어간 것 치고는 괜찮았다. 밥이 무료인 것도 장점.
밥을 먹고 가마쿠라로 향하고자 '소부선 쾌속' 노선에 몸을 실었다. 점심시간인데도 사람으로 가득하다.
가마쿠라 역에 내려 지역철인 '에노덴' 노선으로 환승하는 곳 도착. 근교 소도시 지역 전철 특유의 향취가 느껴진다.
다음 에노덴이 올 시간이 꽤 길기에 짬을 내 기념품샵도 들른다. 특히 오른쪽 사진의 커다란 에노덴 마그넷의 경우 두터운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어 정말 탐났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에노덴의 특별함에 대해 별반 공감하고 있지 못했던 터라 패스했다(여행이 끝난 지금은 다소, 아니 굉장히 후회한다).
십여분이 지나고 도착한 작은 에노덴 전철. 초록과 베이지의 색 조합이 특징인데, 기관사께서 직접 나와 승객들의 탑승 여부 등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처음 들른 곳은 하세역인데, 이곳에서 유명 사찰인 '하세데라(長谷寺)'와 '고토쿠인(高徳院)'을 들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뭇 근교 소도시의 그것 다운 풍경이 관광객들을 반긴다. 본디 큰 불상이 있는 고토쿠인만 들를까 했지만, 인터넷에서 하세데라에 대한 추천도 꽤 있어서 가는 길에 들르기로.
저 멀리 있지만, 딱 보면 '아, 저곳이 하세데라겠구나' 싶으실 것이다.
도착한 입구 앞. 정문에 걸려있는 붉은 등에 하세데라라고 쓰여 있어서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근처의 유치원에서도 나들이를 왔는지 시끌시끌한 분위기. 입장료는 400엔이다.
하세데라의 첫인상은 작지만 정말 관리가 잘 돼 있는 정원 같다는 것이다.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연못과 손 씻는 곳 등이 있다. 아직 초입이지만 특유의 고즈넉함이 사찰 같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경내 지도를 보니 꽤 올라가야 한다. 지금 시각이 3시 12분인데, 고토쿠인 이후에도 일정이 꽤 있는 만큼 서두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절이다 보니 불상들이 많은 편인데, 그 모양과 형태도 가지각색인 데다 그 양도 상당해 자연스레 셔터에 손길이 간다. 머리에 물을 부어볼 수 있는 체험형 불상(?)도.
반복된 계단 오르기에 약간의 지침을 느끼며 내 곁에 기댈 수 있는, 책임져야만 하는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스스로의 가장 부족하고 못난 모습과 마주하게 함을 실감한다. 평소보다 더 빨리 지치고, 그 모습에 짜증을 내는 등 평소보다 더 한심해지는 나 자신 말이다. 본디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일정 부분 연기를 하면서 살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 스스로를 마주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부족한 사람임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느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본당인 관음당까지 올라가는 동안 보이는 풍경들. 소원을 적은 굴껍데기를 매달아 놓은 곳이라든지, 작은 연못 속 잉어들도 빠뜨릴 수 없다. 잠깐 모습을 비췄다가 다시 저어기 먼 곳으로 도망치는 황금빛 잉어.
작은 법당 안을 빙 두르고 있는 돌아가는 청동제 원통. 서너 번 돌면서 실컷 즐기고(?) 나서야 만족이 돼 자리를 뜰 수 있었다(와이프와 함께였다면 한 번 돌리고 바로 끌려 나왔을 것이다).
관음당 뒤편의 전망조망대에 올라가는 도중에 찍은 사진. 3분의 2 지점에서도 이렇게 멋진 뷰가 펼쳐지는 만큼 '맨 위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지 않나' 싶지만 정상에서는 확실히 더 멋진 광경이 펼쳐진다.
정상에서 찍은 건 아니지만 좀 더 탁 트인 가마쿠라 앞바다의 모습.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곳도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는 포인트.
문득 이곳에서 넓은 바다를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해변까지 내려가고 몸을 담가야 바다를 제대로 즐겼다고 생각하고 행복해하는 이들도 있겠지 싶은 생각이 든다. 전망대에 올라가는 것만이 답인 줄 알고 살았던 이가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을, 바다에 뛰어들어야 행복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너무 늦게 스스로가 물고기임을 깨달은 이들에게 있어 가장 쉬운 선택은 아마도 그대로 전망대를 쭉 올라가는 것일 터다. 제일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가장 넓고 멋지게 바라보는 삶에 만족하는 것. 이미 너무 많이 올라온 만큼 지금까지의 수고와 노력들을 무로 돌린 채 바다로 향하긴 너무 늦었나 싶고, 주변에서도 '여기까지 와서 내려가긴 아깝지 않겠냐', '미쳤냐!'라고 만류할 테니 말이다. (위와 같은 선택을 한 이들이 박수를 받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삶을 택한 물고기는 결코 '가장 행복한 물고기'가 될 순 없을 것이다. 그에게 헤엄치기에 적합한 지느러미와 유선형 몸체, 그리고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아가미가 달려있는 한은. 제 아무리 멀고 힘들지언정, 우리가 용기를 내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심지어 바다에 도착해서도 물고기로서의 삶이 허락되지 않을지언정, 적어도 해변가에서 바다의 짠내라도 맡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전망대보다는 훨씬 행복한 삶을 제공해 줄 테니 말이다. 누가 알겠나. 우리가 어물전에서 좋은 가격에 팔리는 멋진 상품이 될지. 또 운이 좋으면 바다에 잠시잠깐이라도 몸을 담그는 서퍼나 해녀가 될지. 중요한 것은 자기가 물고기라는 것을 깨닫고 바다와 가까운 삶을 택하는 것, 그것뿐이다.
다시 내려온 관음당. 일본 최대급인 9.18m에 달하는 목조관음상이 모셔져 있으며, 바로 옆에는 기념품샵을 겸하는 관음박물관이 있다. 관음상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니 패스.
작은 정원이 하나 있고, 그걸 지나면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리이(붉은 문)가 보인다. 신사로 통하는 문과 상징물로써 안쪽에 있는 신성한 장소(신역)와 사람들이 사는 바깥쪽 장소(속세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는데, 부정한 것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결계로서의 역할도 있다고. 안에 들어가 보면 동굴 속에 작은 불상들이 많이 놓여있으나 볼 것은 별로 없는 편이다.
도리이 옆에 자리한 작은 서원(사경소). 일본의 정원 양식 중 하나인 '카레산스이'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못 등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 등으로 물가 정원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라고. 비슷한 곳 중 교토의 은각사(킨카쿠지), 료안지, 텐류지 등이 참 인상 깊었는데, 그만한 규모는 아니더라도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어 좋았던 곳이었다.
색깔이 참 멋져 찍은 한 컷. 여행을 다니고 사진을 찍으며 스스로가 큰 것보다는 작고 디테일한 부분에 집중하는 사람임을 느낀다. 내가 그런 것들을 더 좋아하고, 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보다 집중하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아니 다짐해 본다.
서원에서 나오니 관리인분께서 이끼들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뽑으며 관리를 진행 중이시다. 이곳이, 그리고 일본의 정원들이 유독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듯하다.
이제 볼 만큼 다 본 것 같으니 빅 부다(Big Budda), 가마쿠라 대불을 만나러 고토쿠인으로 갈 차례다. 아마 많은 분들이 가마쿠라를 슬램덩크 성지순례와 대왕부처님을 보기 위해 찾는 곳으로 알고들 계시겠지만, 하세데라 역시 일본 특유의 고즈넉함과 평온함이 공존하는 정원과 사찰, 그리고 자연에 둘러싸여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좋은 포인트인 만큼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