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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 Aug 12. 2020

최초의 욕

그 기억 때문인지 강압적인 무언가에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한다.



누군가 내게 강압적으로 “~해” “토 달지 말고 해” 명령하듯 말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왜 그렇게 싫어하나 생각해보면 7살 때, 치과 의자에 강제로 눕혀졌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오른쪽 앞니가 반만 남아있었다.

비 오는 날, 집에서 얌전히 있으라는 엄마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언니를 조르고 졸라 집 밖으로 나갔었다. 언니는 자신의 키보다 조금 작은, 긴 우산을 들고 있었고, 나는 그 우산을 내가 들겠다며 달라고 졸랐다.

한 손엔 언니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엔 우산을 들고 신나게 걷다가 집 앞 골목 끝자락에서 솟아있는 턱에 걸려 넘어졌다. 언니 손을 잡고 있던지라 같이 넘어졌는데, 나만 다쳤다.


입 쪽으로 꽝하고 강한 통증이 느껴졌고, 손바닥과 입에 피를 줄줄 흘리며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보니 내 앞니의 반이 없었다. 나는 깨진 치아 사이로 혀를 밀어보고, 음식을 먹다가는 ‘찌이익’하고

구멍으로 음식을 밀어내며 놀았다.


그날 언니는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는 사실에 엄마한테 엉덩이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맞았다고 했다. 지금도 가끔 “네가 그날 나가자고 하도 졸라서 데리고 나간 건데, 동생 이빨 부러뜨렸다고, 내가 얼마나 혼난 줄 알아?”라며 원망 섞인 말을 하곤 한다.

놀라신 엄마는 나를 치과에 데려갔고, 의사 선생님은 어차피 유치라서 나중에 빠질 테니 그때까지 그냥 지내라고 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사진 속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힌다.

깨진 앞니만큼 시커먼 공간이 앞니에 김을 붙인 맹구처럼 볼품없는데, 사진마다 ‘이~~’ 하며 웃고 있다.


어른이 된 지금, 치아가 잘 썩곤 한다.

아무리 양치를 열심히 해도, 심지어 교정하는 기간에는 무언가 먹기만 해도 바로 양치를 했었는데도

이가 잘 썩었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사탕이며 과자며 돌도 씹어 먹을 기세로 단 것을 좋아하던 내 이가 성할 리가 없었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치과에 자주 갔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병원이 되었다.


이가 부서진 뒤로 또 한 번 치과를 갔는데 그땐 이가 썩었던 것도 아니고,

앞니 위에 있는 단단한 잇몸에 여드름처럼 무언가가 생겼었다.

어느 날 혀에 뭔가가 느껴져 엄마에게 말씀드렸고, 엄마는 내 윗입술을 들춰보시더니 치과에 가자고 하셨다.  


가기 싫다고 버티는 내게, 엄마는 치과 가서 치료 잘 받으면 집에 오는 길에 미미 인형을 사준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나는 미미 인형을 손에 넣겠다는 일념으로 치과에 갔다.


치과의사는 나이가 지긋하신 아저씨였는데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치과 의자에 누웠고, 엄마는 옆에 서 계셨다. 의사는 내 잇몸에 난 뾰루지 같은 것을 기다란 주삿바늘같이 생긴 뾰족한 무언가로 사정없이 찔렀고, 너무 아파 깜짝 놀란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쳤다.

심지어 고름인지 피였는지 입에서 찝찌름한 맛까지 느껴졌다.

몸을 비틀며 발버둥을 치자 엄마와 간호사는 양쪽에서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팔과 다리를 붙잡고 꽉 눌렀다. 팔과 다리가 붙들려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나는 머리를 사정없이 좌우로 흔들었다. 결국 간호사 한 분이 더 다가와 내 머리까지 꽉 잡았다. 이로써 나는 어느 곳 하나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벌어진 입을 통해 사정없이 욕을 쏟아냈다.


“개 아기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숫자 욕!!! 놔!!!”


결국, 의사 선생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안 되겠다며 의자를 올려주었고, 그러기가 무섭게 나는 엉엉 울며 엄마도 뿌리친 채 치과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 와중에 어쨌든 치과 의자에 눕긴 했었고, 끝까지는 아니어도 치료를 받긴 했으니 미미 인형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밖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어디서 그런 욕을 배웠냐며 엄마가 얼마나 창피한 줄 알아? 엄마·아빠가 너 앞에서 욕한 적 없는데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라고 말하며 내 등짝을 때렸다.


건너편에 사는 J오빠에게 배운 욕들이었다. 나는 J오빠의 여동생 M언니와 자주 놀았다.

M언니네 집에 가서 놀고 있으면, J오빠는 “야. 너 이거 따라 해 봐.(숫자 욕)”라고 시켰고,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느낌상 나쁜 말일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주워들은 말들을 그 날, 치과에서 내 팔다리를 잡고 있는 그들에게 고래고래 외쳤던 것이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때만 생각하면 낯 뜨거워 숨고 싶다며 고개를 절레절레하신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켰으면 그 어린 꼬마 입에서 그런 쌍욕이 줄줄 나왔는지 흉봤을 거라며,

계산하면서 사과하고 나오는데 아주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며 깔깔거리곤 하신다.




그때 나를 못 움직이게 꽉 누르던 어른들의 손에서 느껴지던 힘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내게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서 그런 건지,

누군가 내게 강압적으로 무언가 시키면 괜한 반발심이 생기고, 하려던 것도 더 하기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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