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좋은 게 더 많았을걸
회사 앞에서 자취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사람들한테는 회사 옆에 사는 걸 비밀로 해라, 안 그러면 야근이 많아진다 등등. 귀찮아서 그냥 진실을 말했다. 실제로 부장님이 늦은 회식 이후 나만 택시비를 안 챙겨주신다든가 했지만(부장님 저 뒤끝 있어요) 그거뿐, 회사 앞에서 자취하는 건 거의 무조건적으로 이득이었다.
일단 대중교통을 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운 좋게도 깔끔 떠는 나와 맞는 새 집이었다. 모든 게 다 차가운 톤이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다.
자취 로망이라고들 한다. 현실과 로망 그 사이 어디쯤...
0. 한 달에 10만 원 가까이 나오던 대중교통비 > 1만원
아예 안 돌아다닌 건 아니라서 버스 지하철 합쳐 만원 정도. 택시비는 한 달에 이만 원쯤이려나. 일주일에 5일, 한 달에 20일이라는 시간을 거의 집과 회사의 근처에서만 생활하게 되니 자연스러운 결과기는 하다. 평일 약속은 잘 잡지 않는 타입이라, 기껏해야 집 앞에 사는 다른 회사 메이트 오빠와 함께 저녁을 먹는 게 다였다.
1. 유통기한을 자주 검색하게 되었다.
유통기한을 검색하는 이유는 사실 '날짜는 이미 지난 거 알겠고, 그래서 얼마나 더 먹을 수 있는데?' 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검색해보고 조금 지난 것도 잘 먹게 되더라. 특히 발효식품에 대해 너무 관대해졌다.
2. 그래서 건강이 나빠졌다.
새집증후군으로 인한 건조함, 먼지 등과 함께
자꾸 이상한 걸 주워 먹으니까 장 건강까지 합세해 피부까지 엉망이 됐다.
피부만이겠는가,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까지, 온갖 병이 다 생겼다.
3. 맛집에 집착을 하게 된다.
원래 나는 맛집을 그렇게 찾아서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언제나, 이왕이면,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왜냐면 맛없는 건 집에서 충분히 많이 먹어봤다. ( = 내 요리 )
4. 과일은 주스로 사 먹는다.
자취생에게 쥬시라는 브랜드는 거의 뭐 엄마다. 엄마 보고 싶으면 쥬시를 간다. 특히 수박쥬스.
스타벅스에도 과일컵을 팔지만, 매일 먹기에는 비싼 편이다보니. 쥬시짱.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과일은 귤 정도. 물론 이것도 절반은 뭉개져서 버린다.
5. 책상인지 식탁인지 선반인지 짐짝인지
모를 것들이 많다. '식탁'의 목적을 가진 것을 굳이 구매하지 않았는데,
항상 작업하면서 옆에 두고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젠 뭐 그냥 서서도 잘 먹는다.
침대에서도 먹는다. 안 흘리면 되는 거지 뭐. 엄마가 보면 등짝스매싱일 것들.
6. 생각보다 나는 개 나약한 존재였음요
예전에는 무거운 거 들지 못하게 한다든가 하면 약간 자존심이 상하곤 했는데
( 왜!! 나도!! 들수있써!!! 무시하지마 문다!!! 같은 마음 ) 이젠 아니라는 걸 안다...
내가 고정시킨 행거랑, 애인이 고정시킨 행거는 다르더라.
아빠가 무거운 거 들어서 옮겨주니까 새삼 아빠의 존재가 필요해졌다.
7. 내가 옷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본집에서는 드레스룸은 부모님 차지, 내 옷은 여기저기 분할되어 나누어져 있었다.
자취를 하게 되니 여기저기 숨겨져 있던 내 옷들을 다 꺼내와서 이 좁은 집에 박아야 했다.
매 월마다 10-20만 원 정도의 옷 소비를 꼬박꼬박 해왔는데
자취를 시작하고 옷을 사는 행위가 뚝 끊겼다. (사실 먹느라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8. 게을렀던 것에 부지런해졌다.
반대일 줄 알았다. 귀찮아서 집을 엉망으로 해놓고 사는 거 아닐까 걱정했다.
아니더라. 내가 치우지 않으면 아무도 치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러다 보니까 아 어차피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할거, 하면서 치우더라.
9. 그렇지만 원래 부지런했던 것에 게을러졌다.
커피를 타 먹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퍼 먹기 귀찮아서 먹지 않는다.
설거지하기 귀찮아서 아예 안 먹는 거일 수도. 역시 사 먹는 게 최고다...
10. 돈 << 넘사 << 건강
'건강보다 중요한 건 돈!'이라는 마인드에서 '돈보다 중요한 건 건강이구나.'로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뭐 건강을 잃고 나니까 드는 생각일 수도.
11. 냉장고 = 음식물 쓰레기장
생각해보면 냉장고의 기능은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한다. 여서. (뭔가 논리적인 것 같음)
물론 '상하지 않은 음식물 쓰레기들'이 주로 냉장고로 들어간다.
상하지 않게 보관하다가, 상하기 직전에 내버린다.
더 많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대충 이 정도.
아무튼 만족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