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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새벽 Feb 11. 2020

내가 빼앗긴 겨울

원치 않는 고추들에게, "슬프지 않아, 화가 나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Sex Education)> 의 시즌2의 7화 이상을 시청하시고 읽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겨울이 싫다.



설 연휴에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롱패딩이 옷장으로 직행했다. 롱패딩을 입어야 하는 날은 추운 겨울일 테니, 그런 날 딱히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겨울이 싫다. 분풀이라도 하듯 패딩을 옷장 속에 처박아 넣었다.


겨울에 태어난 나는 이 계절을 참 좋아했다. 크리스마스와 생일, 다가오는 연말. 그 기간만 되면 나는 케이크 앞에서 캐롤을 부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받았다. 사랑받는 아이, 그게 참 달았다. 어쩌다 눈이라도 내리면 온 동네에 발자국을 내며 돌아다녔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축제의 기간. 빠르게 닫히는 하늘 덕에 가득 차는 불빛들을 좋아했다. 아주 추운 밤을, 차갑고 하얀 공기들을, 참 좋아했다.


그날도 참 추운 밤이었고, 버스의 히터가 참 따뜻했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잠들었고, 누가 나를 만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잠에서 깼다.






그날 입은 옷을 버렸다. 내가 왜 옷을 버려야 하는지 잘 몰랐다. 경찰에서 경과를 알려주기 위해 건 전화를 이유 없이 피했다. 왜 피하는지도 몰랐다. 두려웠다. 뭐가 두려운지도 몰랐다. 내가 잠든 탓일까 봐, 아무리 피곤해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신 버스 정류장 근처에 가지 않았다. 버스를 타지 않았다. 도망치듯 이사를 했다. 회사 바로 앞의 오피스텔을 구했다. 대중교통을 타지 않아도 되도록. 지갑에 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님의 명함을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면서도,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을 떨면서도, 그러면서도, 잊고, 살아야 했다.


도망쳤다. 멀리멀리. 그러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드라마인,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봤다. 이게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이렇게 다시 꺼내온 이유겠지. 드라마에 버스에서 성추행당한 아이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내 감정이 불안하다는 걸 느꼈다. 왜? 왜 저 아이가 버스를 못 타야 해? 왜?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나는 드라마 속 이야기에 계속 화를 냈다. 그러다 친구들이 함께 버스를 타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엉엉, 소리 지르면서 울었다. 처음 드는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부러웠다. 여성의 연대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그 시절의 나에게도 있었다면, 멍청하게 피하려고만 했던 내가 덜 아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멍청하게 피하려고만 했던 나의 아픔'이, 그제야 미친 듯이 밀려들어왔다.


지금까지 나는 괜찮은 척을 했던가? 몇 년을 제대로 울지도 못 하다가, 처음으로 토하듯 울었다. 악을 쓰며 우는 울음의 절반 이상은 욕이었으리라. 개새끼. 개새끼. 하나씩 차오르는 생각들이 터져 흘렀다. 나는 왜 도망쳤지? 왜 내가 힘들어했지? 뭘 두려워했지? 내가 왜?

그렇게 악을 쓰며 울다가, 그마저도 패배감이 들어 그만뒀다. 처음으로 토한 울음인데도 참 짧았다. 아마 나는 또 가끔, 이렇게 울겠지. 그리고 그 울음들은 전부 다 짧겠지. 온갖 감정들이 지나간 뒤, 남은 생각은 단 하나였다. 울며 주저앉아있을 수 없었다. '내가 원치 않았던 일'로 내 인생이 흔들리게 둘 수 없었다. 우는 것조차, 아까웠다. 내가 왜 울고 있는 거지? 되묻는 물음들엔 한 가지 답뿐이었다. 드라마 속의 그 아이 역시 울고 힘들어하다가도, 마지막에 이런 대사를 뱉는다.


"슬프지 않아, 화가 나지."





드라마에서 한 선생님이 여성 학생들에게 '여성이 연대하는 이유'를 찾아오라는 숙제를 낸다. 그들은 공통점이 없어 고민하다가, 마지막에서야 단 한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 여성 모두가 겪은 아주 불쾌한 일. 어떤 답을 냈냐는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원치 않는 고추들밖에 없네요.'라고 답한다.





내가 빼앗긴 겨울.

소중한 걸 빼앗긴 나는

돌려달라며 주저앉아 우는 것 대신

옷장 속 롱패딩을 다시 꺼내 입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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