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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혁 Jul 02. 2022

느린 교수

거의 다 벗겨진 그의 머리는 반짝였다. 이마와 정수리의 중간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아슬하게 놓여있었고, 그 주위로 왼쪽부터 반대편 오른쪽 귀 뒤까지 머리가 둥글게 나있었다. 그나마 풍성한 구레나룻 위에는 테가 얇은 회색 안경이 놓였다. 그는 양 팔이 펑퍼짐한 푸른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허리 위 겨우 걸친 회색 바지 밑으로 넣어 입고는 했는데, 셔츠와 바지 색이 조금씩 달랐을 뿐 학기 내내 그의 옷차림은 비슷했다.


교양 동물 생물학을 가르치는 그는 넓은 이마 위 몇 가닥 남은 잔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밀거나 느슨하게 조여진 벨트 위로 삐져나온 셔츠를 정리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얼굴에는 엉성한 본인 모습에 흡족이라도 하는 듯이 항상 미소가 퍼져있었고 어색한 손짓이 어우러진 느릿한 말투로 강의하며 이따금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 게 있으면 질문하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포근한 미소가 퍼져있던 얼굴, 말투와 행동은 그의 느림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가 신기했다. 교양 수업 단 하나만을 20년째 가르치고 있는 교수님이 지나치게 느린 사람으로 비쳤다. 연구는 진행하고 있기는 한지, 조금만 공부하면 A를 받을 수 있는 이 교양 수업이 아닌 멋들어진 전공 수업을 가르칠 의향은 없는 것인지 조용히 오지랖 부리고는 나는 이 교수님처럼 느릿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나를 위로했다. 


나는 급한 사람이었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미국 유학 10년 차. 미래를 향해 달려야 마땅하다는 공기에 짓눌려 있던 나는 주변에서 끊임없이 쏟아내는 갖가지 조언에 치여 살았고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다는 바람과 부족한 유학생이 되고 싶지 않다는 욕심에 사로 잡혔다. 


졸업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고 취업과 대학원이라는 갈림길 또한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장 내가 잘하고 있다는 확인받을 수 있는 수단은 없었고, 졸업 후 한국으로 귀국할 것인지 미국에 남을 것인지 정하지도 않았었다. 나는 그저 매일을 바쁘게 달렸다. 어딘가 도착은 해야 하는데 목적지를 몰라 방황하던 레이싱카 같았다.


이런 나의 성향은 가벼운 강박으로 이어졌다. 매일 아침 원하는 시간보다 늦게 일어나면 어딘가 불편했고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설 때면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얕은 불안이 일기도 했다. 지금 이 시간에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과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이라는 자신에 대한 요구를 친구 삼아 매일을 살다 보면 휴식은 사치가 되고 여행은 재미가 없어진다.


매주 3일, 동물 생물학 수업을 들을 때면 느린 교수님은 성급한 나와 대비되어 내 강박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고, 이런 고민이 귀엽다는 듯 느릿한 말투로 나를 토닥였다. 포근한 외모와 말투, 어색한 동작으로 강의를 이어가며 내 급급한 마음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이 나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가 긴 수업 중에 중요한 부분을 집어 알려줄 때면 몸에 힘을 준 채 글씨 한 톨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내게 이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니 눈으로만 봐도 괜찮다고 나를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느림은 안주가 아니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끊임없이 자문하다 회의에 빠져 삶을 포기한 사람의 느림이 아니었다.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고,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서 풍기는 여유였다. 어쩌면 천천히도 괜찮을 수 있겠다는 마음을 처음으로 품어봤다. 그는 느렸지만 여유로웠고, 평안해 보였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학기가 끝나기 전 마지막 시험, 그는 겹겹이 쌓인 시험지를 들고 강의실에 도착했다.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시험 전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질문 있나요?" 아무도 질문하지 않아 어색한 침묵이 강의실을 꽉 채운 그때, 이런 고요가 부끄럽다는 듯 머쓱하게 웃고 있는 그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질문했다.


"조금은 느긋해도 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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