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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혁 Jul 12. 2022

태평양을 사이에 낀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두꺼운 군화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던 11월이었다. 막사의 불이 다 꺼진 후 나는 불침번을 서기 위해 내복 위에 군복을 겹겹이 쌓아 입고 외투까지 걸친 후 생활관을 나섰다. 불침번이라고 해봤자 복도에서 2시간 동안 서있는 것뿐이었지만 신병이었기에 잔뜩 긴장했었다. 나는 복도 중간 화장실 입구 옆 군화 살균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빛을 친구 삼아 멀뚱히 서있었다.


껴입을 수 있는 건 다 꺼내 입었지만, 추위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마땅히 하는 것도 없는 120분 동안 온몸의 신경은 추위에만 집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손에 입김을 부는 것과 바로 앞에 놓여있던 의자의 유혹을 애써 뿌리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미리 핫팩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과 아무도 오지 않을 복도 중간에 놓인 의자에 잠깐이나마 앉아있을 용기가 없던 나는 누가 봐도 신병이었다.


무료하게 한 시간쯤 서있었을까. 한 병사가 복도 반대편에서 어둠을 헤치고 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순간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혹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빠르게 점검했다. 발의 각을 맞췄고, 왼손은 허벅지 옆에 가지런히 놓은 후 조용히 경례했다. 이런 나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조금 끄덕거리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은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내게 군화 살균함의 중간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에 몸을 기대고 있으라고 했다. 정확히 이 부분이 따뜻하다고, 몸을 대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편히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웅교는 이런 식이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가 마음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당시 나는 웅교를 몰랐지만, 남은 한 시간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도와준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다.


두 번째 만남은 이발을 통해 이뤄졌다. 입대 후 처음으로 휴가를 나가게 된 나는 별로 있지도 않은 머리를 예쁘게 가다듬고 싶다는 생각에 이발 잘하는 병사를 수소문했다. 대부분 웅교를 지목했고, 나는 감히 먼저 다가가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약속시간 5분 전 나는 이발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거울 너머로 나보다 조금 작은 키에 갈색 뿔테 안경을 낀 그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웅교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내게 간단한 인사를 건넨 그는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쓱 훑더니 바로 바리깡을 들었다. 시원시원한 그의 손길에는 연륜이 묻어있었다. 끊임없이 윙윙거리던 바리깡 진동 소리를 배경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동갑인 것을 알았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뭘 전공하고 있는지 대화를 나눴다. 이발이 끝날 때쯤 거울에 비친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다. 


유학생에게 우정이란 모래사장에 아슬하게 쌓인 모래성과 같다. 잦은 출국이라는 파도가 위태롭게 유지되는 모래성을 강타하고 하나둘씩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 관계가 이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은 환경 탓일까 고민하지만 결국 화살은 나에게로 향했고, 시간과 공간의 괴리 앞에서 무기력해졌다. 한 번 더 연락할 수 있었는데 따위의 고민을 하다 보면 유학생인 나의 인연은 언젠가 식는구나, 그나마 남아 있는 모래성도 언젠가는 쓰러지겠구나 체념한다.


군대에서 새로운 관계를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허물어질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런 나의 고민이 가소롭다는 듯 웅교는 9개월이라는 군번 차이에도 불구하고 말을 놓으라고 했고, 나는 그의 말이 꼭 명령인 것 같아서 얼떨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거울에 비친 그는 나와 비슷한 길이의 짧은 머리에 입술 왼쪽 위에는 작은 점이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어딘가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진심으로 말을 놓고 편하게 하라는 웃음. 진심으로 친해지자는 웃음이었고, 진심으로 모래성을 천천히 쌓아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전역 후 파리로 떠났다. 한인 민박에서 일을 구한 그는 아직 부대에 있던 내게 전화를 걸어 소매치기 범을 쫒다가 왼쪽 허벅지에 칼을 맞은 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보내며 흥미로운 인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프리 다이빙을 새로 배웠는데 선생님께 재능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나눠줬다.


군생활을 마치고 내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도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생경하게 기억나지 않을 즈음 핸드폰은 울렸고 항상 웅교였다. 그는 꾸준히 내게 안부를 전했다. 우리는 항상 마무리로 다음 약속 기약했고 전화를 끊고 나면 누군가 지구 반대편에서 내 생각을 해준다는 것에 감사했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5월 중순, 기말고사 준비 중에 어김없이 핸드폰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나는 공부하고 있던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그는 내가 진심으로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 고백이 부끄러워 속이 알싸했다. 카페 밖 큰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를 엿듣는 것만 같았고 나는 그 마음을 들키기 싫어 미간에 힘을 주었다. 속절없이 무너진 모래성들 앞에서 혼자가 편해졌던 나는 그 순간만큼은 태평양을 사이에 끼고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함께 성을 지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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