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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혁 Jul 05. 2022

요란한 침묵

고요을 깨는 침묵

외할머니댁으로 향하는 그 길의 풍경은 항상 눈앞에 선명하다. 삼청동 즈음 한복을 입고 셀카봉에 고정된 핸드폰 카메라 구도에 잡히기 위해 애쓰는 외국인들, 서로 발걸음 속도를 차분하게 맞추며 걸어 다니는 연인과 그런 그들이 방해되는 듯 급하게 움직이는 회사원 무리. 그들은 항상 목적지가 있고 각자만의 이유로 바빠 보였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나 도착한 수유리 할머니 댁은 고요하다. 첫 손자인 나의 탄생을 축하해주기 위해 할아버지가 거금을 주고 산, 이제는 고장 난 에어컨과 요양원에 입원하신 할아버지의 빈 방, 첫째 딸인 엄마를 포함한 삼 남매의 독립은 모두 이 고요에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 조용한 집을 벗삼아 오랜시간 혼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반가움을 크게  내시지 않는다. 왼쪽  밑의 점을 가리는 보랏빛의 무테안경과 흰머리의 비율이 검은 머리를 추월하기 시작해 은은한 회색 빛깔을 띄는 꼬부랑 머리로 우리를 반기시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항상 얕은 미소가 번져있다. 현관문을 넘어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던 그때, 수백 대의 차가 에워싼 12차선의 광화문과 여행객으로 붐비던 삼청동, 오후 드라이브를 즐기던 북악산 차들을 정신없이 지나 수유리에 도착해 마주친 할머니의 미소는 더욱 조용하게 느껴진다.


한때는 명절만 되면 수유리 집은 삼 남매 가족으로 붐볐었다. 특히 설날의 풍경이 그리운데, 부엌에서는 학교 급식실에서 볼법한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에 할머니표 떡국이 끓고 있었고, 그 냄새와 수증기가 집 전체를 따뜻하게 에워쌌다. 기다란 나무로 촘촘하게 덮인 마룻바닥 위에 녹색 담요가 펼쳐졌고, 그 위로 윷들이 거침없이 꽂혔다.


떡국 위에는 종이 분쇄기에 갈려 나온 것 같은 김이 가족의 북적거림에 흥이 겨워 춤을 추고 있었다. 할머니는 바쁘셨다. 세 가족의 떡국을 준비하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돈을 모으기 위해, 손자 손녀들을 돌보기 위해 매일을 바쁘게 지내시던 그 모습은 수유리에 올 때마다 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 한 명 같았다.


시간 만을 탓하기에는 너무나도 조용해진 수유리 집에서 할머니는 이제 침묵을 지키며 살고 계신다.


지난주, 교회를 마치고 엄마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엄마와의 통화 너머 아슬하게 들린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조수석에서 몰래 둘의 통화를 엿듣고 있던 나는 오랜 시간 할머니를 찾아뵙지 않았다는 얕은 죄책감이 일었고 오만가지 핑계를 들어 나를 변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둘의 대화가 멈췄다.


엄마와 할머니의 목소리로 가득 찼던 차 안은 수유리의 주택처럼 갑자기 고요해졌다. 한창 나누던 대화 주제의 내용이 고갈되고 나눌 이야기가 없어진 엄마와 할머니는 그 누구도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타고 핸드폰 너머 할머니에게로 갔다. 전기장판 위에서 몸을 녹이고 계셨을 할머니는 엄마의 교회 권사 투표 결과가 궁금하다는 명목 하에 전화를 걸었다. 침대와 맞닿은 벽에 기대어 엄마의 번호를 빤히 쳐다보시다가 겨우 전화를 걸었을 할머니가 눈에 선했다.


불과 20분 전 내게 먼저 투표 결과를 물으셨던 할머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확인하셨다. 딸의 목소리를 죄책감 없이 들을 수 있는 핑계였다. 할머니는 내게 물으신 질문 그대로 엄마에게 물었고 엄마는 아쉽지만 이번 권사 투표에서는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전했다. 그 뒤로 두 분은 나눌 말이 없었다.


조용했던 차 안은 둘의 눈치싸움으로 요란했다. 할머니는 아직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셨고, 그런 할머니를 알아챈 엄마는 굳이 먼저 전화를 끊지 않으셨다. 혹여나 꺼내실 말이 있으시다면 기어코 들어드리겠다는 마음이었지만, 할머니 또한 엄마의 배려를 읽으셨는지 이내 인사를 건네고 급하게 전화를 끊으셨다.


서로가 전화기 너머 서로를 눈치 보고, 서로의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읽으며 살피던 그 순간, 시동 소리만 시끄럽게 나던 차 안에서의 그 순간은 조금이라도 더 목소리를 나누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으로 어느 때보다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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