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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하 Dec 19. 2023

봄 저녁 연구를 시작합니다

study of chun

연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부드럽게 옷 너머 피부를 어루만지는 바람,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동네… 


‘봄 저녁’ 하면 떠오르는 기억의 한 풍경입니다. 그 기억에서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저녁 시간임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야외에, 거리에, 벤치에, 주차장에, 골목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평소엔 인사도 잘 하지 않고, 심지어 처음 본 사람들임에도 마치 친한 친구들처럼 두 손을 맞잡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순 모두의 마음이 하나를 이룬 듯한 기적의 순간, 마법 같은 유대감의 시간, 저는 그것을 ‘봄 저녁’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슬프게도, 그런 봄 저녁의 순간은 우리 일상에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 두려워집니다. 연대란 단어는 남의 얘기만 같고,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타자'는 언젠가부터 '지옥'이 돼버렸습니다. 혈연이 아니면, 같은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좀처럼 함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그 안에서도 조금만 어긋나면 영영 작별하기 십상입니다. 


우리 삶에서 과연 마음이 모이는 경험을 또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요? 봄 저녁, 그것은 어쩌면 아주 오래 전 우연히 마주친 단 한 번의 사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각색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한낱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봄 저녁’은 있다고, 그런 순간을 다시금 맞이해야 한다고 믿어봅니다. 그런 갸날픈 희망이 오늘날의 짙은 절망을 이겨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봄 저녁 연구가 믿는 것은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삶이고, 그 위에서 우리가 반복하는 일상이고, 그 일상에서 아주 가끔씩 빛나는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나와 또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어쩌면 ‘봄 저녁’이 가리키는 것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고 다독이는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좌절이 되고, 좌절이 절망으로 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오늘날입니다. 그런 절망들은 우리가 어렵게 붙잡고 있던 희망을 너무나 손쉽게 앗아갑니다. 봄저녁 연구회는 그럼에도 다시 희망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시작은 바로 ‘나’이며, 내 안에 흐르는 아름다운 멜로디 한 소절입니다. 그것을 정확히 옮겨낼 수 있다면, 내 안의 무언가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기적처럼 멋진 일일 것입니다. 



2023년 겨울, 

봄저녁 연구회 회장 이준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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