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주의(survivalism)는 우리에게 다소 생경한 단어다. 생활에서 자주 만나는 일상 언어도,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표현도 아니다. 우리가 보다 가깝게, 와닿게 생존주의를 만나는 곳은 영화나 만화, 게임 같은 서브컬처 속 디스토피아 세계관이다. 이를테면, 필시 핵 전쟁이 조만간 도래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지하 방공호에 틀어박혀 비축한 통조림을 아껴먹으며 지상에 확산된 방사능이 저감되기를 기다리는 중년의 레드넥 남성 같은 이미지에서 우린 ‘생존주의’의 전형을 확인한다.
허구의 세계관이나 망상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생존주의의 삶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방공호 시설을 갖춘 호화 주택 단지의 매매가 늘고 있다는 뉴스 얘기만이 아니다. 아직 핵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우리는 저마다 생존주의자가 되어 운좋게 살아남은 하루하루에 감사하고 불확실한 내일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생존주의’의 개념적 정의는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이 미래의 긴급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비하는 운동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때 ‘긴급상황’은 “자연 재해, 사회 정치적 혼란 등 다양한 종류를 포괄하며, 개인의 조난에서 국제적 대재난까지” 그 폭이 넓다. 이러한 접근은 생존주의가 비단 핵 전쟁이나 좀비 바이러스의 창궐 같은 특수한 상황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개인이나 복수의 인원들이 생명의 위협이란 절체절명 상황에 놓여 생존이 행동 강령의 최우선 가치가 된 상태를 생존주의, 혹은 생존주의자의 삶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딘가에 의탁할 집단도, 소속된 공동체가 없을 때 개인에게 가장 먼저, 시급하게, 실존적인 위험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생존’이다. 생존주의는 개인으로 외떨어진 인간 존재에게 들이닥친 필사의 과제다. 생존주의자들은 영하 50도 아래의 알래스카 계곡에서 꺼진 불을 지피고자 애를 쓰는 잭 런런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실존적 공포에 직면하고 있다. 주변에는 도와줄 누구도 없고, 절박한 내 심정에 공감해줄 이도, 자신의 몫을 양보하여 기꺼이 손을 내밀 이도 없다. 오로지 나의 힘으로 이 위기를 헤쳐나가야 한다. 나를 둘러싼 이 상황은 꽁꽁 얼어붙은 알래스카 빙하처럼 무소불위의 냉담함 그 자체이다. 냉담한 사회에서 나약한 존재는 도태되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이 이 세계의 진정한 룰이다. 천신만고 끝에 생존의 위험에서 빠져나온 이들은 안전 가옥에서 따뜻한 난롯불을 쬐며 여전히 지옥 속에서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는 또 다른 생존자들을 구경한다(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자세로).
이런 상상을 보태는 것이 허용된다면 생존주의는 오늘날 지금 여기에 작동하고 있는 우리의 심상 세계에 대한 메타포, 혹은 익숙한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시대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사이버펑크 문화로 도배된 디스토피아 미래 도시나 핵 전쟁 이후의 미국 등지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얘기다.
오늘날 우리가 생존주의자가 된 데에는 복잡한 이유가 없다. 바로 공동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때 ‘공동체’는 기본적으로는 가족에서 출발하여 마을, 학교, 직장, 지역, 국가를 넘어 이념과 종교를 아우르는 토대를 의미한다. 타인과 함께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원리이자 오랜 시간 경험 속에서 구축된 문화이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전통적 개념의 공동체는 붕괴되었다. 사회 구성원들은 더 이상 공동체에 자신의 자유를 헌납하길 거부하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자립 가능한 '개인'으로서 존재가 가능하다고 믿는 듯하다. 이를테면, 과거 공동체가 제공하던 '문화'를 서비스 상품들로 세분화하여 필요에 따라 구매하는 식으로 말이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미래를 예측 가능한 반복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삶이 기계처럼 정합적으로 맞아떨어진다면, 내일도 어제나 오늘과 같은 일상의 판박이라는 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된다면 더 이상의 불안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믿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시야는 캄캄한 어둠에 휩싸이는 것처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때론 죽음처럼 두려운 것이다. 그런 절대적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선 어떤 믿음이 필요하다. 어두운 어둠 속에서도 눈을 뜨면 밝은 빛이 나타날 것이란 믿음.
중요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 사회는 기계적인 반복도, 믿음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반복에서 오는 삶의 리듬은 주로 노동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절기를 중심으로 한 농업 사회라거나 산업화 물결 속에서 우린 기계적인, 혹은 기계보다 더욱 정밀한 어떤 반복성을 발견했다. 근대의 아주 잠깐 이루어졌던 정규직 노동, 지역 중심으로 한 고용 체계, 결속력 강한 노동 조합, 평상 직장 개념은 짧고 아름다운 한철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 비가시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을 열어주던 종교가 쇠퇴하면서 믿음의 근간이 무너진 데엔 긴 설명이 필요없다.
공동체도, 일상도, 종교도 사라진 작금의 현실은 실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해도 무방하다. 고도로 발전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은 가능한 모든 것을 해체하고, 경쟁하고, 팔거나 버리고 있다. 이 시대의 유일한 이념은 이익 추구일진대 문제는 속도다. 인터넷과 인공지능 등 오늘날의 거의 모든 기술은 이익 추구를 위해 이용되고 있으며, 마치 천년 이후의 선물 거래를 미리 하는 것 마냥 물리적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지 오래다. 뜨겁게 회전하는 욕망의 회로는 장밋빛 미래를 소상히 그려내고 있지만 실제 우리 삶은 내일조차 예견하지 못한다. 모든 게 급변하고, 모든 게 유동적인 나머지 ‘확실한 것’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신기루뿐이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노력한 보상이 최소한의 기대에도 못 미치거나 외려 나의 것을 빼앗길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생존주의자가 된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어 삶의 무게가 오롯이 혼자만의 것이 될 때, 삶의 의미나 목표를 잃은 채 어쩌다 보니 되는 대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생존주의를 경험한다. 물론 이때 ‘생존주의’는 앞서 언급한 개념적인 생존주의, 핵 방공호를 차려놓고 현대판 던전 앤 드래곤과 같은 역할극을 수행하는 망상적 생존주의와는 구별된다. 고립된, 분리된 개인의 외로운 사투. 이는 ‘만인의 개인을 위한 투쟁’으로 묘사해도 좋으리라. 평온한 세계 속에서 개인이 주관적인 지옥도를 누구의 공감도 없이, 도움도 없이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심정적 생존주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말장난 같은 이 ‘심정적 생존주의’란 표현은 섬뜩하다. 무엇보다 개인이 느끼는 생존의 대치 상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잔인하다. 이 긴급한 위협은 비가시적이고, 때로는 현실의 객관성과는 유리된 채 진행되기에 타인이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한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전부 개인의 선택과 책임’이란 공공연한 원칙이 굳건한 자본주의에선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이 떨어져 도달한 생존주의란 바닥은 '자연적인 것'처럼 위장된다.
상황은 심각하다. 어쩌면 핵 전쟁 이후의 미국보다 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고, 지금의 현실은 어떻게 더 안 좋아질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졌으며, 입을 열면 비명이 나올 것 같은 나의 상황에 누구도 공감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생존주의는 문명 이전보다 야만적이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잔혹하다. 불과 10년, 2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보다 안정적인 고용 조건과 균등한 이익 분배를 위해 투쟁해왔다. 그러나 지금 사회 구성원들은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 문학적인 비유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실존적인 의미의 ‘생존’이 당면 과제이다. 사회 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아주 순조롭게, 쾌속 질주하듯 악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풍경들을 종합했을 때 그릴 수 있는 앞날은 낙관적인 구석이 별로 없다. 공동체를 벗어난 개인화가 더욱 가파르게 전개될 것이고, 치안이나 의료, 교육 등 사회적 재화는 모두 민영화되어 비용에 따라 질을 달리 할 것이다. 지방이 붕괴되고, 수도권 중심의 거대 도시화가 완성되면 국가나 정부도 힘을 잃고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기업의 위세가 절대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그야말로 ‘생존’이 최고로 희소성 높은 상품이 되어 구매력이 있는 계층만이 겨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들이 서비스 비용을 지불할 돈이 있을 때에 한해서다. 안전이 보장된 치안 구역의 거주민과 거기서 밀려난 현대판 호모 사케르(내버려진 존재)의 구분이 엄격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두 계층의 운명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여서 이들 가운데에 있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비참하게 내버려지지 않기 위해 연대하고 단결하기보단 말도 안 되는 경쟁과 부조리를 감내하며 ‘안전 지역’으로 편입하기 위해 무진 애쓸 것이다. 이것은 가까운 시일 안에 펼쳐질 생존주의적 미래의 광경이다. 그러나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어리석은 인간이 만든 지옥도가 더 심화되기 전에 기후 재앙으로 지구란 행성이 먼저 소멸할 판이니 말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대단히 순화된 표현으로 묘사된 오늘날 한국의 생존주의적 삶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양 극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공동의 규범과 윤리, 즉 사회적인 가치 전반을 도외시하는 ‘외로운 늑대’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생존주의자는 ‘생존’이란 수동적-방어적 입장에서 탈피하기 위해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이를 대상으로 능동적-공격적 행동에 나선다. 오랜 고립 생활 끝에 특정 대상이 아닌 사회 전체를 망상 속 적대 세력으로 덧씌워 테러를 감행한 ‘묻지마’ 범죄자들,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생존주의자들의 연대로 구성된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정치 조직이나 기성 단체와는 뚜렷하게 차별된다. 과거의 행동 양식이나 문법과는 전연 상관없는 방식으로 만나고 연합하고, 헤어지고 다시금 조직된다. 인터넷 게시판, 스레드 상의 이용자 연대, 혹은 특정 취미나 프로젝트를 위한 커뮤니티가 사례가 될 것이다.
빙하 시대보다 더 야만적이고, 사이버펑크 소설보다 더 아찔한 기술 문명 사회에서 길을 잃은 생존주의자들은 일시적인 '외로운 늑대'와 '공동체' 상태를 오가며 불안정한 삶을 이어나간다. 확실한 것이 없고, 불안이 점차 커져갈수록 '든든한 울타리'에 대한 염원이 커져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 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던 종교나 이념, 민족이나 국가에게서 이러한 토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탈중심적 다원화된 공동체의 발로는 위계 없이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보편성이 사라져 소통이 불가능한 고립무원 그 자체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오는 헤드셋을 낀 채 상대방에게 말을 전달하고자 무진 애를 쓰는 가족오락관의 게임 마냥 이 시대는 일종의 희비극이 되어가고 있다. 공동체 의식의 부재라는 시대적 상황이 개별 생존주의자로 하여금 강력한 소속감, 굳건한 공동체의 필요성을 요구할진대, 그런 고로 '커뮤니티'라는 정서적-물리적 공존 기반이 생존주의 시대를 지배하는 화두가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절대 단순하지 않고 중층적으로 포개어져 있다. 무너진 공동체를 재건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에 대한 대안을 마련함과 동시에 '공동체'를 오용하고 사유화하려는 욕망에 대한 현명한 처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연대를 위한 우리의 노력을 실로 좌초시키는 것은 후자 쪽이다. 이러한 욕망의 대표적이고 극단적이며 강력한 현실 속 사례는 사이비 종교다. 이들은 종교의 보편적인 언어를 그야말로 악용하여 생존주의자의 불안을 더욱 심화시키고 고립시켜 합리적 판단을 방해한다. 타인을 세력화의 먹잇감으로 인식하는 사이비 종교-공동체로 인해 생존주의자들의 의심은 더욱 깊어지고, 건강한 커뮤니티 구축은 어려워진다.
우리는 생존주의 시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한 징후들은 썩 좋지 않으며, 예상되는 미래도 밝은 구석은 없다.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 정직하게 얘기하자면 '희망이 없다', 정도의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존재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마지막까지 확인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실천적 행동으로서 '커뮤니티'라는 생존주의자들의 공존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반사회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커뮤니티가 과연 가능할까? 현실의 사례를 찾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있으리라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 말곤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소 무거운, 장황한 서문으로 시작했으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작은 커피 가게의 이야기이며, 소상공인의 삶이 생존주의 시대에 과연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는 것이다. 그렇다. 그동안 나는 심정적인 생존주의자였고, 동시에 작은 커피 가게를 운영하는 소상공인이었으며, 그곳에서 많은 희망의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례와 단상들을 조금씩 정리하는 글의 출발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