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스불 vs 화산

그림을 읽어드립니다.

by JinSim

몇 주간 지루하게 만들었던 디폼블록 작품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완성!"

지루하게 블록을 꽂던 아이의 얼굴에 환하게 웃음꽃이 피어난다. 힘들었지만 완성을 했다는 기쁨을 느꼈겠지? 치료실에 멋지게 전시를 하겠다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다. 늘 주눅 들어 있던 아이의 입에서 자신의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새 많이 성장했구나' 덩달아 뿌듯한 미소가 피어난다.


이번엔 그림을 그려보자고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 그림을 못 그린다며 일 년 남짓 만나면서 그림 그리기는 거부하던 아이. 웬일인지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더니 한번 해보겠단다. 이번엔 쭈뼛거림이 없다. 가슴이 쿵쾅 기분 좋은 설렘을 느낀다.


아이에게 도안 두장을 제시하고 선택하도록 했다. 한참 두장의 그림을 바라보더니 B 도안을 선택한다.

도안 속 여러 개의 이미지 중 두 개를 골라보고 두 이미지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아이의 선택은 '주방'과 '물고기'였다. 화면 안에 주방을 커다랗게 그려준다. 뭔가 화지를 꽉 채우니 답답한 모양새다. 그 답답한 모양새가 아이의 마음 같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가스레인지 위에 활활 불꽃을 그리더니 물고기 한 마리를 그려 넣는다. 물고기를 요리하는 그림이라고 했다. 아이에게 그림 속에서 너와 더 가까운 이미지는 무엇인지 물었더니 주방이 자신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인덕션을 깨끗이 관리해 주지 않아서 화가 나있어요." 물고기는 누구냐고 물어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며 입을 닫는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요리한 물고기를 먹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물고기가 맛없는 물고기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는 생각이 많아 보인다. 무언가 들키면 안 될 거 같은지 보호막을 씌우듯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아이에게 도안 A로 같은 작업을 해보겠냐고 제안했더니 "꼭 해야 하나요?" 묻길래 "꼭 할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번 해볼게요" 하며 종이를 뒤집어 뒷장에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번에 선택한 이미지는 '화산'과 '뱀'이었다. 화산에서 용암과 화산재들이 맹렬히 뿜어 저 나오고 있는데 그곳에 살던 뱀 한 마리가 멀리 도망을 가는 내용이었다. 추가적으로 옆에 용암에 불타고 있는 나무도 그려주었다.

이번엔 어느 이미지가 너와 같냐고 질문했더니 뱀이라고 했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물었더니 화산은 활동을 멈추었고 나무들이 많이 타버렸다고 했다. 뱀은 멀리 도망가 살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화산에 대해 물었더니 '엄마'라고 대답했다. "엄마가 화낼 때 무서워요"


"엄마가 화날 때 무섭구나! 엄마는 언제 화를 내셔?"

"내가 게임시간 어기고 많이 할 때랑 손 안 씻었다고 화내요. 근데 나는 손 씻었는데 엄마는 자꾸 안 씻었다고 다시 씻으라고 해요"

"그럴 때 네 마음은 어떤데?"

"짜증 나고 화나요."

"화나면 너는 어떻게 해?"

".... 그냥 참아야지요."

"네가 화날 때 네 얼굴을 찰싹찰싹 때린다고 엄마가 걱정하시던데?"

"네? 엄마가 그래요? 한 번밖에 안 그랬는데..."

"그때는 어떤 마음이었니?"

"화가 나서 그랬어요. 근데 왜 내 얼굴을 때린 건지는 모르겠어요"

"엄마가 많이 놀라셨겠다"

"아니요! 얼굴을 왜 때리냐며 더 화를 내던데요?"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없어 보였다. 엄마는 화산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주는 존재이고, 아이의 표현을 들어주고 공감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다. 엄마는 엄마의 규칙만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를 화나게 하는 것은 자기라며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아이의 갑갑한 마음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자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된 게 아닐까?

그래도 무기력하기만 하던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표정이 다양해지고 목소리가 커지는 게 느껴진다. 농담도 한 번씩 하는 유머러스한 아이였다. 무기력한 아이가 자기표현을 하기 시작했다는 건 아이가 한 뼘 성장했다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에게는 불편감을 주는 일이다. 이전에는 의사표현이 적어 답답했는데 이젠 부정적인 표현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삐뚤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양육자는 더욱더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를 키우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양육자 상담시간에 어머니에게 아이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화산'이 어머니라는 말에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어머니가 화낼 때 아이가 무섭대요"

"요샌 그렇게 자주 화 안 냈는데요... 애들은 왜 나만 나쁜 사람 만드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 감기 유행이라 손 깨끗이 씻으라는게 잘못된 거예요? 더러운 손으로 코 만지고 입에 넣고.... 으으으 너무 더럽잖아요! 다시 씻으라고 하면 나 보란 듯이 10분씩 물 콸콸 틀어놓으면서 짜증을 막 내면서 씻는다구요! 정말 속상하네요. 내가 어려운 걸 하라는 것도 아니고... 설명하면 알겠다고 대답만 하고는 또 거짓말을 한다니까요! 애들이 왜 그럴까요? 미칠 거 같아요!"

"아이도 화를 표현할 수 있죠~ 어머니, 아이는 가스불이고 어머니는 화산인걸요. 어머니의 에너지가 지금은 너무 강해서 아이들이 눌려있지만, 감정을 꾹꾹 누르다 폭발하면 압력이 세져서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 거예요."

"선생님 내가 애들한테 무리한 걸 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밖에 나가서 냄새난다고 손가락질받지 말라고 씻으라는게 그렇게 나쁜가요? 선생님이 가르칠 때 솔선수범 하래서 저는 늘 그렇게 한다고요~ 애들이 말을 안 듣는 걸 어쩌라는 거예요?"

"어머니는 염려와 사랑을 표현하신 거지만 아이들이 느끼기에는 통제와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아이도 자신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한다는 걸 알지만 어떤 방법으로 어머니와 소통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고요.

내가 바뀌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누군가를 바꾼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아이들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어머님이 스스로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머니의 표정과 말투에는 억울함과 서운함이 가득하다. 아직 나 할 말이 더 많다는 듯이 자신의 힘듦을 토로한다. 부모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시길 매번 권유해 보지만 늘 거절을 하시는 어머니... TV프로그램을 보면서 거울치료 하고 있다며, 그 엄마들 속에서 자신을 본다고... 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자신이 바뀌는 게 버겁다고, 그냥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사는 게 많다고, 도와주지 않는 남편이 너무 서운하다고...


어머니에게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어머니도 아이들이 잘 자라기를 마라는 마음이 크시지만 원가정에서 받아본 경험이 없으니 따스한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서라고 조심스레 말해본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가 더 힘들어요!"라고 외치는 어머니의 내면 아이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막혀버리고, 나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고 하지만, 이해를 하려면 정서적인 안정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여전히 불안한 엄마는 내 말을 정말 이해하신 걸까? 직면과 통찰까지는 어쩌면 쉬운 걸지도 모르겠다. 통찰 이후의 변화까지 가는 것이 진정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하지만 그림으로 직면하고 통찰하는 과정은 늘 놀랍고 경이롭게 느껴진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엄마로 거듭나시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그 안정감 속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기를 기원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