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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경희 Jun 19. 2022

가전의 진화

잘 나가면 녹아버리는 가전의 운명


생활가전의 첫 등장은 대체로 요란스럽다. 기존에 없던 물건이 공간에 덩그러니 놓이기 때문이다.


초창기 TV가 딱 그랬다. 안 그래도 통통한 모양인데 나무장에 고이 담아 옹기종기 모여봤다. 계속 크고 얇아지다가 벽걸이가 되었다. 이후 TV를 안 보는 시간에 존재감을 없애기 위해 그림을 띄우거나 (더프레임) 말아서 집어넣거나 (올레드 R) 빛만 쏘는 (프로젝터)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다음은 아마 투명디스플레이. 머지않아 빈 벽에 화면이 뿅 나오는 SF 같은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주방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며 존재감이 높던 김치냉장고도 수납장에 숨은 빌트인으로 진화했다. 특히 신축 아파트는 경쟁하듯 새로운 기능을 공간에 녹인다. 음식물처리기, 식기세척기, 심지어 자동 계량 쌀 냉장고까지 빌트인이다. 정수기도 비슷했다. 커다란 물통을 끼우다가 배관으로, 직수로 바뀌고 냉장고로 들어갔다.


물론 변화는 점진적이다.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의 친구는 볼멘소리로 비슷한 가격의 스마트폰은 2년마다 바꾸면서 세탁기는 10년을 쓰고 유통도 힘든데 실적을 어떻게 따라잡겠냐고 했다. 생활가전은 긴 호흡으로 천천히 바뀌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새로운 가전은 공간을 차지하며 맥락 없이 툭 등장했다가 본질적인 기능만 공간에 남기고 벽면으로 쏙 숨어드는 운명이다. 결국 공간의 주인은 물건이 아닌 사람이고, 그를 둘러싸는(viron) 환경(environment)은 동선을 위해 한 걸음 물러나기 때문이리라.


공기 가전도 마찬가지다. 전선을 꼽아 이동식으로 사용하던 선풍기는 천장 실링팬과 에어컨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바람을 불어주는 기계가 아니라 쾌적함 그 자체이다. 부동산에서는 바닥 면적이 곧 자산이다. 도입 초기 거실 한쪽을 차지하던 스탠드형 에어컨이 벽걸이가 되고, 천장에 박힌다. 필수 생활 가전은 점점 더 고요하고, 더 안 보이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다음은 공기청정기의 차례. 앞서 순백의 냉장고가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던 과도기가 있었다. 시각적 오염을 줄이고 본질만 담백하게 남기는 것이 생활 미감을 높인다. 공기청정기는 아직 형형색색인데 결국 벽과 천장으로 숨어들 것이다. 예전엔 집집마다 공기청정기가 있었어, 하고 회상하는 추억의 물건이 될 것이다. 이미 에어컨이 그 기능을 뺏기 시작했다. 지금의 화려함은 사그라지기 전 마지막 불꽃 같은 것이다.


대기 중인 다음 타자는 가습기다. 자율주행 차량이 돌아다니는 세상에 사람들이 콧구멍 좀 촉촉하게 해보겠다고 물동이를 이고 지고 박박 솔질한다. 계절이 지나면 꺼냈다 넣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편리한 직수가습을  빌트인으로만 하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다. 스탠드형이 당장 매출에 도움이   안다. 하지만 아직 작고 소중한 우리 팀은 살짝  멀리 보고 날카롭게 쏘아야 한다. 고향 땅에 짓고 있는 엄마의 집을 생각해보면  길이 정해져 있다. 호호 할머니가 될 10 뒤에도 쓸모 있어야 쓰레기가  된다.


우선 초기 고객을 더 귀하게 모시려 한다. 궁극의 습도 관리에 누구보다 먼저 오신 것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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