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경희 Feb 28. 2024

따릉이 배달부 - 2

운수 좋은 날


그날은 참 운수가 좋았다. 첫 배달을 집 앞 족발로 시작해 자전거 도로를 탔다. 거리는 있지만 평지에 배달팁도 높았다. 가는 길에 디저트 배달도 잡으며 룰루랄라 도착.


그런데 배달 앱을 따라간 곳에 5층 건물이 없었다. 다른 지도 앱으로 골목을 헤매다 빌라 발견.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501호도 아닌 그냥 5층. 올라가니 딱 한 집이 있었다. 사진을 찍고 딩동~ 벨을 누른 뒤 완료 버튼을 눌렀다. 건물을 떠나 다음 가게로 향하는 길, "배송취소" 알림이 떴다.


사유는 오배송!


"xx길 14"에 가야 하는데 "xx길 24"에 배달했다. 도로명주소 옆옆옆옆 건물이다. 502호도 있었다면 실수 안 했을 텐데. 문제는 그다음.


고객이 현관 사진을 고객센터에 보내면 나의 사진과 비교해 오배송 판정이 난다. 이 경우 고객은 재배송 또는 취소를 선택한다. 그분은 전액 환불을 하셨다. 음식비+배달비. 음식비는 배달부가 배상한다. 족발은 26,000원이었고 배달비 5,400원도 못 받는다는 전화를 받았다.


디저트를 기다리고 계시니 일단 배달을 계속했다. 픽업지와 도착지에서 감사하다는 기분 좋은 인사도 받았다. 하지만 머리에는 족발이 가득. 내 실수지만 기운이 빠져 일찍 집으로 향했다.


따릉이 페달을 밟으며 족발을 떠올렸다. 족발집 사장님이 참 친절하셨는데, 앞으로 매칭 안 되려나. 족발보다 저렴한 음식이면 덜 속상했을까. 그나마 5만 원은 안 넘어서 다행이네. 조금 기다리셨으면 다시 갔을 텐데. 배달부가 음식값을 낸다는 안내가 없었나. 족발은 다른 분이 맛있게 드셨을까.


조금 더 생각하니 환불 정책은 "나쁜 배달부"를 가정한 듯하다. 거짓 배달 후 본인이 먹을 수도 있으니. 치킨을 한 조각 빼먹기도 한다던데 엘리베이터에서 맡는 냄새는 진심 유혹적이다.


오배송 건 이후 그만할까 하다 이만큼 재밌는 유산소 운동이 또 있나 싶었다. 또렷한 목적지와 낯선 골목, 낯선 사람이 좋다. 배달 중에는 자의식이 옅어진다. 음식의 안녕과 교통안전, 출발지와 도착지, 동선에 집중한다. 내가 누구인지 잊는 무아지경의 배달. 명상이라도 한 듯 머리가 맑아진다.


따릉이 1시간 대여 마감 10분 전에 반납 안내가 온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 집 주변 마지막 배달을 잡거나 앱을 종료한다.


배달하시는 분들을 좀 더 헤아리게 되었다. 우리 집 현관이 통로 안쪽이라 엘리베이터에서 호수와 방향을 알 수 있게 포스트잇을 붙였다. 집 앞 초인종에 "감사합니다 :) "라고 인사도 적었다.


어느덧 26건 기록. 누적 50건이 되면 뱃지를 받는다. 별 건가 싶지만 그래도 해봐야지.

작가의 이전글 따릉이 배달부 -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