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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Jan 26. 2021

일상의 균형 잡기

"오늘 밤 주인공은?"까지 노래를 부른 뒤 마이크를 상대방 쪽으로 향하면 모르긴 몰라도 100명 중 99명은 '쌍엄지'로 본인을 가리키며 최대한 새침한 표정과 간절한 눈망울로 "나야 나(나야 나... 나야 나)"를 자동적으로 외칠 것이다. 어디 주인공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도 있더냐. 우린 어느 무리의 한가운데 그 자리를 선점하고 쟁취하기 위해 참으로 애쓰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데 그 꿈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이고 본질이며 때론 전부가 되기도 한다.


물론 중심에 선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것은 내 의지만 가지고 될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되고나도 그 왕관의 무게를 버티기란 어렵다. 하지만 포기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지구방위대처럼 거창한 꿈을 꿀 필요도 없다. 그저 되는대로 살아도 이미 우리 삶이 충분하겠지만 때론 불필요한 고민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사실 줄반장부터 이장님까지 쩌면 우리는 각각의 어떤 무리에서 이미 리더고 중심이며 센터에 서있곤 한다. 중앙을 버티며 서있는 그들이 얻게 될 혜택은 탐나지만 그 이면을 본다면 그 삶이란 실로 고기 때문에 쉽사리 나서길 꺼려하게 되는데 한발 뒤로 물러서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진정 Winner로 각인될 때도 있다. 어찌 되었든 팀의 전체를 이끌기 위해 스스로 중심이 되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색깔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적당한 합의점을 찾아내며 단합을 이루고 균형을 잡는 그 노력이 단한 일이긴 하다.


이런 균형 잡기가 하나의 무리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화두가 될 때도 있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우리는 방역과 예방에서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것처럼 이 논쟁은 안전이나 경제를 뛰어넘어 이제는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가 되었고 '방역'과 '일상'의 중간 어디 즈음을 찾는 일이 너무나도 필요한 순간이지만 여기저기서 곡소리 나오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일이 이토록 힘들고 어렵나 보다. 서로의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어버린 이 마당에 남을 돌볼 마음의 여유 우리에게 있을 리 없 그 중간을 찾는 일의 참된 목적이라면 양측의 균형을 잡기 위함인데 어쩔 땐 시소놀이의 이치와도 비슷해 보인다. 놀이터에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른 신체조건을 가졌기에 숫자를 맞춰서 양쪽으로 나눠 앉는다고 해도 균형단번에 맞기란 어렵다. 중심을 잡아줄 중재자를 자처하며 누군가가 불리한 어느 한쪽으로 엉덩이를 들이밀고 개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논쟁은 시작된다. 물론 어떤 역할이라도 해보려는 몸부림이었겠지만 결국에는 공정 문제 그리고 특혜시비에 휘말리게 되므로 그 균형점을 찾는 일은 아마도 불가능해 보인. 고대 신화에서도 메인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의 '절대 신'정도 되는 누군가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균형 잡혔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로 얽혀 불편하지만 억지로 웃음 짓는 그런 상황 말고 나 홀로 내 마음에서 균형이 필요한 상황도 있다. "천천히 빨리 와"처럼 이상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말도 안 되는 말이 묘하게 의미가 서로 통할 때가 있다. 보통 나는 약속시간에 여유롭게 도착해서 기다리는 그 행위를 즐긴다. 그렇게 때문에 기다리기에 지루하지 않을 만한 곳을 골라 약속 장소로 잡는다. 근처에 교보문고 아니면 영풍문고 또는 반디 앤 루니스처럼 대형 서점이 있다면 제일 좋다. 물론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이나 즐겁지만 그렇다고 약속시간을 지나서 도착하는 일마저 함박웃음 지어 넘길 만큼 한가하진 않다. 그때 필요한 그 말이 바로 "천천히 빨리 와"다.


괜히 서두르면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깐 천천히 너의 안전에 최대한으로 유의하며 오되 약속시간에 늦지 않도록 꽤나 기민한 움직임을 동시에 요청하는 것이다. 굳이 정의한다면 상대의 안위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과 너의 시간만 귀하냐고 따져 묻는 나의 마음 사이의 균형 잡기가 될 것이다.


중간을 찾아서 그 균형을 잡아야 하는 일은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게 일어나며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고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생각을 피하며 살 수만은 없다.


한편으론 우리 선조(?)들의 중간지점을 향한 끊임없는 생각과 노력 덕에 세상이 조금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고 우리들은 과거보다는 그럴싸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짜장과 짬뽕에서 고민할 때 짬짜면을 도입한 그분 덕에 그리고 오븐을 두기에는 너무 과하고 전자레인지로는 무언가 부족했는데 에어프라이어를 적절하게 보급하는 그 업체 덕에 그리고 마트의 깔끔함과 구멍가게의 근접성의 중간지점에서 탄생한 편의점처럼 중간을 찾던 그 생각은 분명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반대로 중간을 찾는 그 의미가 리더나 균형처럼 무거운 느낌과는 달리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도 가볍게 사용될 때가 있다. '중간만 하자'는 말은 일상에서 가볍게 오가는 대화에서 쓰는 말 중 하나다.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1등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에 때론 적당한 삶을 지향하는 '중간'이라는 단어를 곧잘 사용할 일이 있고, 문맥상 종종 '평균'을 의미하는 이 말이라면 일반적으로 남들과 나와의 관계에서 중간지점을 일컬을 때 주로 쓴다. 우리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본다면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순서에 의해 일렬로 서야 될 상황이 생긴다. 그중에서도 앞줄에 선다면 여기저기 눈에 띄며 관심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겠지만 그 사랑이란 것이 때론 부담으로 작용하며 독이든 성배일 때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뒤쪽에만 서게 된다면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무관심'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도 있니 그마저도 안될 노릇이다. 이런 일은 회사에서나 강연장에서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좀 쉬었다(?) 가려고 했을 뿐인데 항상 연단에 선 강사는 늘 비어있는 앞자리로 쉬려고 들어온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불러들인다(참말로 기가 막히는 능력이다). 이럴 때 필요한 대비책이 바로 '중간'을 찾는 능력이고 아마도 만국 공통의 룰일 것이다.


이렇듯 요즘 들어 내가 중간을 찾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라면 '당근'과 '채찍'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것이다. 무한정 풀어주거나 방관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사사건건 개입하며 틀어막을 수도 없다. 물론 육아에 대한 생각이다. 어려서는 태권도장에서 하는 것처럼 스티커를 주며 당근을 많이 주었지만 결국에 중요한 건 본인 스스로 느껴서 하는 행동과 생각 하나가 당근 모양 스티커에 이끌려하는 기계적인 열 번의 행동보다 귀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혼내고 윽박지르는 그 채찍질이 도움될 리도 없다. 생각보다는 잘 해내고 있어서 아직 걱정은 없지만 어찌 보면 내 욕심이 진정한 문제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다. 채찍질 한 번에 당근을 기계적으로 번갈아 주는 구시대적인 방법 말고, 당근을 채찍에 묶어 마치 당근으로 때리는(?)것처럼 신박한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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