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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Mar 04. 2021

부모 찬스와 엄친아

이 시대 학부모 관점

미투로 시작되어 빚투로 번진 그 캠페인이 한동안 우리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준 뒤로 잠잠하더니 최근에는 스포츠계와 연예계를 대상으로 학투(학교폭력 미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 대상은 젊은 친구들을 중심으로 최근 유명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을 한 배우도 포함되었고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젊은 남자 배우부터 최강이라던 감독을 은밀히 조롱하며 일부러 마찰을 만들어낸 선수나 서로 닮은꼴인 두 명의 어떤 운동선수들까지 그들의 지난날 과오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으며 주춤하는 모양새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자업자득이다 싶다. 아직은 사건의 전말이나 당시의 증거가 온전히 공개되고 증명된 점은 아니라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 모를 일이며 또 반대로 어느 쪽이 거짓을 고하는지 알 턱이 없으나 모쪼록 빠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져 피해자가 또다시 피해를 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머지않아 누가 기습 면죄를 '허'할지는 모를 일이나 학부모의 입장에서 '원만히' 말고 '제대로' 해결되길 바란다.


우리는 경험해봤듯이 사회적 약자는 영원한 약자였고 강자는 영원한 강자로 군림하며 악순환이 계속 만들어졌는데 (경미한) 처벌을 받은 가해자들도 존재를 하겠지만 별다른 속죄 마저 없이 다시금 사회로 복귀하여 지난 일을 쉽게 무마하도록 둔 일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었다. 뿌리를 뽑을 역할에 나서야 할 책임자들은 오히려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유로 그저 선처해주거나 솜방망이 처벌 (예를 들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마치 고대의 사자굴에 집어넣을 정도의 엄청난 형벌이라 착각하며 대단한 일을 해낸 듯 자화자찬 하지만 '민초'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저 이 현실이 개탄스럽다.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도록 하는 '삼권분립'을 역으로 이용하여 사법은 입법을 핑계 대며 입법은 행정을 그리고 행정은 다시 사법을 탓하며 서로 면피할 구실만 찾으니 이런 사건이 도통 바로잡히지가 않는다. 정작 피해자들이 용서는 하질 않았는데 그들의 교화를 '허'하는 통에 그들은 여전히 '용' 이 되어 강자로 살아가려 한다.


물론 나랏밥 먹는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닐지언데 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탓에 '이번 한 번만' 눈감고 '너만 눈감고' 넘어가기를 종용하며 앞장서서 복귀를 타진하려는 결정권자들의 노력(?) 덕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스크린에 다시 얼굴을 들이밀 수 있다.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복귀 방송을 시작했지만 그 표정은 카메라에 잡히질 않는 탓에 복귀에 힘써준 강자를 향한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약자를 향한 사과를 한 것인지 알 턱이 없다. 물론 그 법을 제대로 활용(?) 하지 못해 아직도 복귀를 못하는 많은 이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미투 캠페인'의 효과는 이 사회를 어제보다는 분명히 조금은 더 바람직하게 만들고 있으며 밝은 곳으로 견인하려 애쓰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안타까운 점이라면 권력자들은 관심 없는 이 일에는 진짜 '소시민'의 삶을 사는 우리들만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할리는 없겠지만 이런 노력이 모여 언젠가는 우리가 꿈꾸지만 여전히 말로만 찾고 있는 '개혁'이 우리의 아이들 세대에 실현되길 바란다.

 

우리가 쓰는 단어의 변화에서도 이 시대가 '불 공정'쪽으로 한발 더 돌아선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구어'로 먼저 사용이 되고 그들 중 광범위하게 그리고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고르고 골라내어 사전에 등재하는데 이게 바로 '신조어'가 되겠다. 전후부터 세기말에 이르기까지 매해 조금씩 더 많이 사용되면서 전국의 어머니들이 사용하고 싶어 하는 단어 1위로 등극했고 마침내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보급으로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라는 말이 폭발적으로 유행했는데 전 국민이 공감하며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도 한마디로 분위기를 제압할 수 있는 엄청난 한마디였으니 그들은 학원 근처에는 얼씬도 않으면서 EBS만 보면서도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시험 전날 자연농원에서 놀고 와도 변함없이 1등이었고 심지어는 체력장에서 마저도 1등을 했다는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별로 해준 것이 없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자랑이었으니 어쩌면 그 시대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공정했다는 사실을 이 단어에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해서 학생은 물론이고 부모도 마찬가지로 공부를 안 하고 받아오는 꼴찌 성적표를 더 이상 수긍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이제는 '엄친아' 혹은 '엄친딸'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단어가 더 이상 유행을 타지 않는다. 이제는 오히려 '아빠 찬스' 또는 '엄마 찬스'가 우리 귀에 더 많이 들린다는 사실은 어쩌면 세상이 불공정 쪽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아이들 문제'로 대동 단결하며 서로의 입장을 공감(?)하고 존중(?) 한 일에 (아이를 둔) 온 국민은 피로감을 느끼다 못해 걱정을 한 아름 짊어지고 살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어떤 대학의 의대 교수가 본인의 아들에게 직접 '아빠 찬스'를 시켜주었다는 내용을 공공연히 자랑삼아 본인의 SNS를 통해 공개한 점을 살펴보면 이 단어가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사라진, 즉 이 사회의 '강자'임을 나타내는 새로운 '표식'정도로 등극된 것 같아 그저 안타깝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저런 일이라면 108배를 하든, 100일 기도를 하든, 작심하고 고해성사를 하든 은밀히 속삭이고 스스로의 가슴을 내리치며 무덤까지 가져갔을 텐데 이제는 자랑처럼 떠드는 걸 보면 정말로 새 시대가 도래했나 보다. 세상을 보면 참담한 심정이지만 지나고 변해버린 세상을 탓하며 과거를 그리워한들 무엇이 달라지랴. 기울어진 운동장이어도 잘 뛰는 놈은 여전히 잘 뛴다(나처럼? ㅎ 농담). 새치기하는 녀석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탓에 경계심을 늦출 순 없으나 나부터라도 그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자'는 그 위대한 원칙만 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줘야겠다.


'아빠 찬스'나 '엄마 찬스'처럼 경박한 단어보다 여전히 '엄친 딸' 그리고 '엄친아'가 더욱 위대한 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만천하에 알려보자. 유행은 원래 돌고 도는 거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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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찬스 없이도) 잘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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