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노블의 기원으로 알려진 ‘워드리스 노블(Wordless novel)’은 글 없는 목판화 이미지로 구성된 이야기다. 20세기 초에 등장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이 형식은 만화의 잃어버린 고리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하지만 70년대 워드리스노블은 새로이 복권되는데, 윌 아이스너를 포함한 그래픽노블 작가들이 책의 물성과 진지한 주제에 주목해 워드리스노블을 만화의 새로운 대안으로 채택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워드리스노블의 계보에 대한 그래픽노블 작가의 주장은 신뢰할만한가. 이 같은 의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그래픽노블 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윌 아이스너는 글 없는 이미지를 계승하여, 하지만 정치적 메시지는 소거한 채, 멜로드라마적 무언극을 연출한다. 그리고 목판화의 표현적 측면에서 워드리스노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는 아트 슈피겔만의 <Prisoner on the Hell>과 아쏘시아시옹(l’association)의 다비드 베, 마르잔 사트라피 작품을 꼽을 수 있다. 더욱이 워드리스 노블의 명백한 계승자는 에릭 드루커일 텐데, 그는 <Flood>에서 워드리스노블의 주제와 형식을 현대적으로 번안한다.
이제 우리는 워드리스노블에서 그래픽노블로 이어지는 계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워드리스노블의 계보에는 근본적 결함이 있다. 워드리스노블은 엄밀히 말해 만화가 아니다. 설사 카툰화, 연속언어라는 동일한 뿌리를 공유할지라도 워드리스 노블은 전통적인 만화와는 다른 경로에서 발전한 형식이다. 아트 슈피겔만과 워드리스노블 작가 린드 워드가 나눈 대화는 워드리스노블과 그래픽노블 사이의 긴장을 의도치 않게 드러낸다. 슈피겔만은 워드에게 어떤 만화에 영향을 받았는지에 관해 물었고, 이에 워드는 유년기 시절 만화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답한다. 게다가 워드가 뒤늦게 할 포스터의 <Prince Valient>을 언급할 때조차 슈피겔만은 만화에 관한 워드의 열정을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위풍당당한 일러스트 아래 안전하게 글을 배치한 <Prince Valient>는 슈피겔만에게는 거의 만화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워드리스노블을 만화에서 무조건적으로 배제할 필요는 없다. 연속언어의 관점에서 워드리스노블은 여전히 만화에 대한 풍부한 함의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글이 워드리스노블을 통해 전하고자하는 주제는 이런 것이다. 워드리스노블은 20세기 시각예술(미술, 영화, 만화)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연속언어에 참여하는가.
독일, 표현주의, 목판화
프란스 마세릴, 오토 뉘켈, 린드 워드는 워드리스노블의 주요 작가다. 그들의 작품세계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건물과 그 아래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군중. 혼란스러운 근대 도시의 풍경이 칸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다. 이 도시는 어떠한 도시인가? 그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독일의 도시다. 벨기에 태생 마세릴은 1923년 독일로 이주해 표현주의자 게오르그 그로스와 친구가 되며 이 후 800여점이 넘는 목판화를 제작한다. 다음으로 독일 태생 오토 뉘켈은 뭔헨에서 분리파에 가입하고 판화와 캐리커처 등 다양한 삽화 작업을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태생 린드 워드는 1926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목판화를 배우고 이때 마르셀과 뉘켈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이처럼 세 작가는 공통적으로, 각기 다른 국적에도 불구하고, 1920년경 독일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 여기서 독일은 워드리스노블을 이해하는 있어 핵심적인 지역이다. 왜냐하면 20세기 초 독일은 다름 아닌 다리파와 청기사파로 대표되는 표현주의의 중심지며 따라서 워드리스노블의 흑백 표면에는 표현주의 양식이 선명히 각인돼 있다. 프란스 마세릴의 <Idea>를 보자. 고층 건물과 공장의 굴뚝이 수직으로 구축돼 있고, 군중과 교통수단은 거리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미국작가 린드 워드 작품 또한 예외는 아닌데, <Wild Pilgraimage> 에서는 왜곡된 원근법으로 변형된 사물들(쏟아질 것 같은 입방체 건물, 각지고 왜곡된 형태의 인간)이 표현주의 도시에 강박적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한 가지 오해해선 안 될 사실이 있다. 표현주의를 워드리스노블의 기원이라 주장하는 건 워드리스노블이 단지 표현주의의 어휘를 차용해서가 아니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보다 근본적으론 목판화라는 표현주의 제작 양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목판화와 표현주의는 어떤 관계인가. 목판화는 표현주의에 의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수단으로 주목받고 선호됐던 제작기법이다. 더욱이 목판화의 간결하고 순수한 표현양식은 표현주의가 다루는 사회적 주제(전후 세대의 불안, 인간 소외, 물질주의)를 전하는데 탁월했다. 물론 목판화의 형식 자체가 정치적 진보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케테 콜비츠와 같이 급진적 정치적 흐름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파시즘을 옹호하거나 또는 파시즘에 의해 강제로 차출되는 퇴행적 정치적 흐름도 있었다. 그럼에도 거친 질감, 굵고 강한 그래픽 효과 그리고 강렬한 흑백의 대비와 같은 목판화의 표현적 잠재력은 분명 정치적으로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워드리스노블이 목판화라는 형식과 사회적 주제가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결합돼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워드리스노블이 새기고 깎아낸 건 비단 물리적 목판만이 아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이어 당도한 대공황과 파시즘, 전후 냉전과 핵전쟁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금융위기까지, 워드리스노블은 각기 다른 시대의 외상을 각인해 흑백의 세계를 찍어낸다.
잉크로 찍어낸 무성 영화
워드리스 노블은 1920~30년대 번성하다 이후 급격히 쇠퇴한 장르다. 사실 이러한 장르의 쇠락은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1740년~ 1900년 사이의 영국 문화 장르를 다룬 연구에서도 이와 유사한 생애주기가 발견된다. 대다수의 소설 장르는 25년 동안 지속됐고, 몇몇 장르는 예외적으로 10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장르가 쇠퇴한 데는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 짧은 주기의 장르일 경우 거의 확실하게 정치적 원인 때문이었다. 복음주의 소설, 자코뱅, 반 자코뱅 소설, 차티스트, 신여성 소설 등 특정 시기 선명한 이념적 주제의 장르들이 그 예다. 이 같은 장르 주기와 정치적 주제의 상관성은 워드리스노블에서 역시 적용 가능하다. 워드리스노블은 노동 운동, 계급 불평등, 부르주아 타락이라는 주제를 다뤘고 그 결과 나치스 정권 시기 표현주의와 함께 퇴폐 예술로 낙인찍힌다. 워드리스노블이 쇠퇴한 원인이 정치라는 주장은 반론의 여지없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쉬운 선택이다. 심지어 정치와 예술의 원론적 관계 외에는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다. 가령 미국에서의 워드리스노블 쇠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국의 정치 상황도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우호적이진 않았다. 이 시기 미국은 점차 총동원 체제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실제로 린드 위드는 작품의 정치적 성향으로 FBI에 오랫동안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치적 요인은 워드리스노블의 급작스런 퇴장에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려 인접하는 다른 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그 원인을 찾으면 어떨까. 옛 형식의 쇠락과 새로운 형식의 등장. 그러니까 워드리스노블은 무성영화처럼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사라졌다는 가정 말이다. 이 가정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무성영화와 워드리스노블에 관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워드리스노블의 글 없는 흑백 이미지는 그러고 보면 당시 유행하던 무성영화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강렬한 흑백의 대비, 기이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배경과 인물은 표현주의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종이로 옮겨놓은 것 같다. 두 예술의 친연성은 프란스 마세릴 작품의 서문에서 보다 분명히 확인된다. 서문을 쓴 토마스 만은 워드리스노블을 자막 없는 흑백의 무성영화로 소개하고는, “방을 어둡게 하라! 너무 오랫동안 심사숙고하지 마라. 영화를 보며 한두 장면이 놓쳤다고 해서 문제 되지 않듯이. 모든 그림의 의미를 한 번에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그리 심각할 필요는 없다. 이 강력한 흑백 인물들과 명암으로 새겨진 그들의 특징을 살펴보라”라고 말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낯설 수 있지만, 이런 영화와 판화의 비교는 1920년대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령 1938년에 출간된 영화 이론서 <der begriff filmisch>에서는 영화와 판화, 영화와 그래픽 아트를 상세히 비교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래픽노블 작가 세스는 기존에 주장된 워드리스노블의 단선적 계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워드리스노블이 만화보다 영화에 더 많은 경의를 표했다 생각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화의 형식(다중 칸, 말풍선)을 그토록 철저히 배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스의 이 주장은 확실히 납득할 만하다. 다만 조금 더 섬세해질 필요는 있다. 워드리스노블이 만화를 외면한 이유가 오로지 매체에 대한 편견 때문일까. 어쩌면 목판화 형식의 워드리스노블은 새로이 성장하는 만화를 받아들기에 낡은 형식이 아니었을까. 워드리스노블과 달리, 당시 만화(코믹 스트립)는 이미 화려한 원색과 음성을 실어 나르는 말풍선을 통해 다가올 시대(오디오비주얼 시대)를 준비 중이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
워드리스노블은 만화의 페이지가 아닌 영화의 스크린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워드리스노블을 창작할 때 무성 영화를 강하게 의식했을지라도 또한 독자가 워드리스노블을 읽을 때 무성영화적 친숙함을 느꼈을지라도, 워드리스노블은 광학적으로 투영된 연속 이미지가 아닌 잉크 질료로 덮인 분절된 이미지다. 오토 뉘켈의 <운명>에 대한 평론은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극장에 혼자 앉아 있는 셈인데 관객, 극장 운영자 모두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 미묘한 즐거움을 준다. 우리는 이야기를 빨리 전개시키거나 심지어 건너뛸 수 있으며 반대로 완전히 중단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 진행과 별도로 각각의 그림을 따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그림 소설의 탁월한 지점이다.” 요컨대 워드리스노블의 본질은 연속언어 더 정확히는 글 없는 이미지로 구성된 연속언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워드리스노블이 글 없는 이야기’라는 결론은 다소 허탈하다. 표현주의, 무성영화를 거처 도달한 결론이 이미 ‘Wordless Novel’라는 이름에 암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이 없는’에 강조점을 놓는다면, 이 소박한 결론은 그림과 연속언어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글 없이 순수한 그림만으로 서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혹은 연속된 칸에서 그림의 서사적 잠재력을 어떻게 최대한 끌어낼 것인가. 게다가 글이 없다는 곤혹스러움은 오직 창작자만의 몫은 아닌데 수용자인 독자 역시 기존과는 다른 주의 깊은 독해 방식을 요구받는다. 독자는 의미를 고정하거나 주제를 중심화 할 글이 부재하기에 시각적 이미지와 이미지의 배열만으로 서사를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누군가에겐 이러한 침묵이 결핍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워드리스노블은 글이 부재하고, 그림은 모호하며, 연속된 칸은 느슨히 결합돼 있다. 하지만 침묵에 잠긴 이미지와 그렇게 생성된 간격은 결코 결핍이 아니다. 이 양식의 진정한 가치는 채워질 수 없는 간극에도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는 인식론적 여정에 있다. 그림의 표면에서 시각적 단서를 찾고, 이미지 배후에서 은유와 상징을 읽어내며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고리를 발견해 전체적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림 이외에 어떠한 도움 없이. 워드리스노블엔 수많은 이야기가 잠재해 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마지막으로 워드리스노블 계보의 문제로 돌아 가보자. 그래픽노블 작가는 그래픽노블의 기원으로 워드리스노블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만화를 진지한 상업 예술로 정립하려는 기획에 가깝다. 오히려 워드리스노블의 실질적인 계승자는 1960년대 이후 발전한 글 없는 그림 이야기다. 레이먼드 브리그스의 <The Snowman>, 숀탠의 <The Arrival>에서 제이슨의 <Hey, Wailt>과 마사시 타나카의 <GON>까지. 그림책, 만화, 그래픽노블 등 제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리지만 모두 워드리스노블의 그림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더 이상 흑백 목판화의 깊은 어둠도, 거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요한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