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은 목소리를 높여 강조했다. 평소에도 쉽게 흥분하는 선생님이었다. 사주를 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잔뜩 힘주어 역설했다.
"일이 잘 풀린다는 사주가 나왔다고 해 봐. 그럼 그거 믿고 열심히 안 하게 된다고. 그럼 잘 안 풀린다고 하면? 그럼 또 어차피 안 될 거 열심히 안 한단 말이야."
아이들은 키득거렸다. 선생님은 그런 데에 마음 쏟을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더 하라고 말했다. 제법 그럴싸한 말이었다. 뇌리에 깊이 남았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니. 물론 난 사주를 종종 본다.
<테넷>의 서사를 빌리면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의 주장에 이렇게 대응할 수도 있겠다.
"일이 잘 풀리는 미래를 봤다고 해 봐. 그럼 그걸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해. 잘 안 풀리는 미래를 봤다면? 그럼 열심히 바꿔."
멋지긴 한데.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what’s happened, happened)이라는 운명론을 반쯤 차용하고 자유의지를 그 속에 포함시키면서도, 결론은 ‘무엇이든 개척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로 수렴시키는 논리는 다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테넷>은 <컨택트>(Arrival·2016)와 비슷하다. 똑같이 미래 예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 <컨택트>는 운명 순응의 숭고미를 풍기고, <테넷>은 옥시덴탈적으로다가 운명 개척의 비장미를 풍긴다(이렇게 보면 <컨택트>의 원작자 테드 창이 아시아계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런 점에서 너무 작위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컨택트>의─테드 창의─메시지가 낫다. 내가 아시아계라서 그럴까?
내가 아시아계라서 그렇다기보단, <테넷>의 서사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 주인공의 행동방식은 그간 놀란의 영화와 비교해 봐도 상당히 단편적이다.
시간은 이야기의 토대일 뿐
시간은 <테넷>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소재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다. 중요한 장면이나 대사도 휘리릭 넘겨버리는 놀란이 영화 내내 시간을 이해할 필요가 없고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된다고 몇 번에 걸쳐 바득바득 강조하는 점에서도 그걸 알 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을 변주해 영화 전체를 구성해놓고 그걸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속내는 도대체 뭘까?
“시간은 모든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 내 영화에서 다른 점이라면 시간의 메커니즘을 스토리텔링에서 당연시하지 않고, 그 메커니즘을 밝힘으로써 관객이 시간의 역할을 탐색하고, 어떤 식으로 액션이 보여지며, 그게 어떻게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이야기가 전달되는지 고민하는 방식을 선택했다.”(씨네21 인터뷰)
놀란은 시간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는 토대로서 다룬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시간 역행 과정’은 서사의 구축을 완성하는 도구, 내지는 게임이다. 관객에게 진짜 제공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다. 주도자와 닐의 관계는 인버전을 통한 싸움 자체가 아니라, 인버전을 통해 그들이 쌓아온 우정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던 순간 증폭됐던 것처럼.
그렇다면 <테넷>을 통해 관객에게 진짜 제공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을 통해 완성될까? 뻔하지만, 주인공 '주도자'다.
주인공의 이름을 '주인공'으로 하는 패기
이름 없는 사람
놀란의 영화는 주인공이 자기 삶을 지켜내는 모험 이야기였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자신이 누구인지 탐색했고, <배트맨 시리즈>의 브루스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했고, <인셉션>의 돔은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 투쟁했고, <인터스텔라>의 쿠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좇았고, <덩케르크>의 토미는 성패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싸움을 이어나갔다.
놀란의 영화가 "소년적인 진지함과 쾌락을 겸비한 놀이"라고 말한 평론가 김병규의 지적은 타당하다. 요컨대 그간 놀란의 영화는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탐구하고 획득해가는 성장의 서사였다. "서사 내부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주체의 뒤늦은 깨달음"과, 그 깨달음으로 이르기까지의 과정이야말로 놀란의 영화가 가졌던 매력의 핵심이었다.
그간의 영화를 통해 보여줬던 모든 성장 서사를 아우르는 게 <테넷>의 주도자다. 과거-미래의 위협들이 교차되어 편집되는 가운데 자기 정체를 알아갔던 레너드처럼, 주도자는 과거-미래의 위협 속에서 현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주도자로서의 자기 정체를 깨닫는다. “우린 같은 괴물이야”라는 조커의 정체성 공격에 맞서 브루스가 다크나이트로서의 역할을 확정했듯, 미래의 후손들이 현재의 인류를 파괴의 주범으로 몰아세워 절멸시키려고 하는 시도에 맞서 주도자는 인류를 수호하는 역할을 확정한다. <인셉션>의 돔과 <인터스텔라>의 쿠퍼가 시간이 뒤죽박죽 된 세계를 오가며 임무를 완수했듯 주도자는 시간을 역행하며 임무를 완수하고, 승패가 결정되지 않아도 싸움에 최선을 다했던 <덩케르크>의 토미처럼 주도자는 아직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다. 주도자의 서사는 놀란이 그간 만들어온 서사들을 관통하며, 놀란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삶의 태도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이다. "내가 주도자야"(I am the protagonist)라는 대사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주도자가 상징적 캐릭터라는 점에 착안해 보면, 주인공의 이름이 주인공(protagonist·주도자)이라는 점, 이름이 없다는 점도 이상하지 않다. 누구나 스스로를 ‘나’로 칭하지 자기 이름으로 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종종 주변인을 아연실색케 하는 3인칭 화법은 제외하도록 하자) 주도자는 “우린 이렇게 살아야 한다”의 본보기로서 모든 관객이 스스로를 대입시키거나 모든 관객에게 대입 가능한 표본이기도 하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테넷>의 경우 그 주도자의 서사에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민’의 소멸
“일이 잘 풀리는 미래를 봤다면 그걸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잘 안 풀리는 미래를 봤다면 그걸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주도자를 통해 표현해내는 <테넷>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그리고 단순하다. <테넷>의 방점은 ‘단순함’에 찍힌다. 그간 놀란을 최고의 감독으로 만들었던 일종의 자아실현 스토리텔링의 마침표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다소간 도를 지나쳐 도리어 놀란의 매력을 격감시켰다. 놀란의 영화는 환상적 소재로 풀어내는 서사적 불확실성 속에서 고민하고 발버둥 치는 이야기였고, ‘불확실성’과 ‘고민’은 추리 게임 같은 환상적 소재들과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현실적으로 호소했다. 그 정점에 섰던 것이 괴물과 영웅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과 행동양식의 굴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다크나이트>의 배트맨이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전율이 일 정도로 멋진 장면이 완성됐다.
<테넷>엔 그런 고민이 없다. ‘고민’이 사라졌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포인트는, 미래의 후손들이 제3차 세계대전보다 더 끔찍한 환경 파괴를 이유로 할아버지의 역설을 감내하고 선조들을 죽이려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대충 퉁 치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후손들의 공격이 이 영화의 토대고, 이는 환경 문제로 설정됐다. 주도자가 여기에 대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서사의 핵심이다. 이 지점이 스토리라인의 토대기 때문에 제대로 짚지 않으면 영화는 타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는데, <테넷>은 그 타당성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놀란은 확실히 기후 문제를 신경 쓰는 것 같다. 그런데…
특수부대원이면서도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던 주도자가 사토르의 말에 멈칫거리다가도, 각 세대의 생존은 알아서 챙기는 거라고 일갈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 웃음이 났다. 아, 그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강이 말라버려서 시간을 뒤집어 자신들이 소멸될 수도 있는데 선조들을 죽여버리기로 결정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미래의 자손들이 결국 “죽든 말든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는 주도자의 꼰대 같은 핀잔만 들었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일단 지구가 내 세대에 망하지는 않는다면 다행이긴 한데.
차라리 환경 말고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어차피 3차 대전으로 다 망할 거 선조들을 모두 죽이기로 했다’라는 후손의 핑계에 대해 ‘전쟁은 너희가 저질러놓고 왜 우리한테 그러느냐’라고 대응하는 게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인버전한 사람들이 원래 세계의 산소를 들이마시는 게 문제라면 빛의 굴절을 통해야 하는 시력은 어떻게 가능한지, 베트남 바다의 요트 위에서 인버전한 캣은 어떻게 마스크 없이 멀쩡했는지…와 같은 궁금증은 설정상의 토론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도자가 캣에게 느끼는 애착, 연인을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겠다는 마음이 세계를 살아갈 수 없으면 부숴버리겠다 마음으로 연결된다는 점 등 허술한 서사의 뼈대는 무척이나 아쉽다. 놀란은 영화를 만들 때 과학적 타당성을 무척이나 중시하며 그게 영화의 재미를 증폭시키는데, <테넷>에서만큼은 서사의 허술함을 과학적 타당성으로 상쇄시키려고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투쟁만 남았다
<덩케르크>가 개봉했을 때 기대에 차서 극장으로 달려갔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어딘가 휑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서사의 실종 때문이었다. 전쟁이라는 무자비한 상황 속에서는 당연히 생존이 최우선 가치가 되고, 생존을 위한 투쟁은 절대적인 정당성을 얻는다. 거기엔 고민이나 서사적 타당성을 위한 장치가 필요 없다. 전장은 당장 5초 뒤에 죽을지도 모르지만 있는 힘껏 달려야 하는 곳이다. <덩케르크>는 서사의 뿌리부터 열매까지가 전쟁 속에서 구성됐으므로, 주인공 토미가 왜·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불필요했다. <덩케르크>의 주제는 삶을 위한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눈물겨운 투쟁'이 <테넷>으로 그대로 옮겨져 왔다. 후손들과의 전쟁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던져졌지만, 보이지 않는 후손들의 위협은 폭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위협과 달리 직관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덩케르크>와 같은 방식의 투쟁을 보여주니, <테넷>에는 다분히 난해한 역-시계열의 복잡성과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비장미, 그리고 가열찬 투쟁만 남았다는 느낌이다.
사실,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 서사의 마침표는 '어른의 지루하고 치열한 하루'가 되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왜 사는가"와 같은 사춘기의 질문은 하루살이의 엄숙함 앞에 꼬리를 내린다. 그런 점에서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묻고 고뇌하는 놀란의 청소년적 성장 서사의 후반부가 <덩케르크>나 <테넷>에서처럼 '열심의 투쟁'으로 장식되는 건 일견 합당한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가 놀란의 영화에 기대하는 게 그런 것일까.놀란의 영화에 전율을 느꼈던 건 아름답고 흥미진진하게 짜여진 고민의 흔적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저 과학적 미스터리와 웅장함 때문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