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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산 Oct 08. 2020

적막이 어둠보다 더욱 짙은 공포임을

<공포분자>


(♬Chantal Chamberland - Smoke gets in your eyes)


"적막이 어둠보다 더욱 짙은 공포임을
흰 뼈만 남은 驛舍역사까지도 알고 있었다."

(기형도 "廢鑛村폐광촌" 中)


양더창 감독의 <공포분자>는 1986년에 개봉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 사회는 국민당 독재 아래에서 저질 오락영화나 반공주의 영화를 생산할 뿐이었다. 75년에 장제스가 사망하고 81년 지방선거에서 야당이었던 민주진보당이 승리하면서 기류가 바뀌었다. 일렁이는 자유화 물결은 대만 영화계로도 번졌다. 대만 영화계의 비주류들(?)은 70년대 말에 시작된 홍콩의 뉴웨이브를 본떠 새로운 뉴웨이브(신랑오·新浪潮) 운동을 시작했다. 사실적인 각본을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보통의 사소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며, 이를 통해 사회상을 담아내는 게 대표적인 특징이다.*


<공포분자>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적막, 무기력증, 우울의 정서다. 풍요로운 타이베이, 처절한 생존투쟁을 1차적으로나마 매듭지은 사람들은 자유화의 바람 앞에서 지리멸렬한 존재투쟁을 새 과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 점에서 양더창 감독의 작품에서 기형도 시인의 냄새를 맡는 일은 어렵지 않다. 평론가 박선영은 기형도의 작품이 탄생한 배경인 80년대 후반의 한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회가 지워준 의무를 등에 업고 청춘의 낭만과 감성을 기꺼이 지불한 사람들이 받아 쥔 것은 어디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허탈과 덧없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혐오와 무기력으로 삶의 기회와 욕망을 포기하기에는 채워야 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고 뚜렷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사회적 자유 속에서의 방황은 80년대 이후의 한국과 대만이 함께 겪었던 성장통이다. (비록 대만은 한국과 달리 21세기 이후 장기적인 불황에 빠졌지만.) 기형도 시인이 서울에서 그랬듯, 양더창 감독은 타이베이에서 허탈과 덧없음, 혐오와 무기력, 기회와 욕망 소용돌이를 그려냈다. 사람들은 태와 무관심으로 점철된 실존적 공허 속에서 발버둥친다.




그렇다면 공허한 사람들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흘러갈까? <공포분자>가 탐구하는 지점이다. 불안한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인물의 시선이 오직 자기 안에 박힌다는 점이다. 남을 살피지 않는다. 나의 희망, 나의 절망, 나의 소망, 나의 욕망, 나의 행복, 나의 불행, 나의 기쁨, 나의 슬픔…이 유일한 이정표이자 동력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샤오밍, <타이페이 스토리>의 아룽, <하나 그리고 둘>의 NJ…도 그렇다. 영화는 다분한 개인주의가 부딪치며 전개된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기형도 "안개" 中)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엇만 갈구하기에 서로를 모른다. 서로를 경계의 대상으로, 공포의 한 요소로 판단할 뿐이다. 양더창 감독이 그려내는 타이베이의 모습은 기형도가 스케치한 도시의 모습과 같다. <공포분자>는 파편화된 개인의 실존적 공허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실존적 공허들이 얽히고설켜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핵심은 현실감 없는 현실의 공포다. 사람들을 위협하는 공포는 현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고, 현실감 없는 현실이다. <공포분자>의 인물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꿈과 소망을 품고 있으며, 이를 배반하는 모든 것을 배척한다. 행복을 현실감으로 좇아 소설까지 썼으나 끝내 찾지 못한 위팡, 안정을 현실감으로 여겼으나 모든 노력이 실패한 리쫑, 일류 사진작가를 추구하는 샤오챵, 자극을 쫓다 살인도 마다치 않는 슈안. 모두 현실감 없는 현실을 산다.


<공포분자> 속 모든 공간은 황량하고 적막하다.


그러므로 표정이 없다. 간헐적으로 감정의 표출을 배설하듯 할 뿐이다. 리쫑의 유일한 웃음은 현실감 있는 현실에 자신이 지으리라 기대했던 것이었다. 남편 곁에서 울었던 위팡은 마침내 그나마의 표정조차 잃어버렸다. 젊은 둘은 아직 웃음도 울음도 없다. 그대로라면, 둘이 표정을 갖게 될 때는 가장 비극적일 때일 듯하다.




현실감 없는 현실 속에선 무엇이 현실이고 허구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샤오챵의 애인이 샤오창에게 소설과 현실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타박했던 건 있는 그대로의 뜻이지만, 위팡이 리쫑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 땐 나조차도 그걸 모르고 신경 쓰지 않으니 당신도 그러라는 의미였다.


마지막의 두 가지 충격적인 엔딩 중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허구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시대에 그걸 구분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중요한 건 모든 이들이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이다.


파편화된 이상을 표현한 연출이 이보다 더 감각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표류와 길 잃음의 공포. 공포의 근원은 주위의 또 다른 사람들, 파편화된 관계다. 리쫑에게 불만을 느끼던 위팡의 공포를 부채질한 건 슈안의 전화였고, 위팡에게 불만을 느끼던 리쫑의 공포를 폭발시킨 건 샤오챵의 전화였듯. 모두 그렇게 산다. 현실에서 반쯤 추방된 채로, 또 다른 사람들을 현실에서 반쯤 추방시키는 데 일조하면서. 오직 자기 자신의 욕망만 알기에,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서로에게 무한한 적막일 뿐인 사람들. 누가 누구를 얼마나 이해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관계들. 양더창 감독도 말했듯, 도시는 “익명의 전화 한 통이 중년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적막한 공포의 땅이다.




양덕창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어둠을 이용한 연출─어두운 시대상을 표현하는─이 정말 훌륭하다. 전화, 소설, 사진 등 오브제 활용도 아주 멋지다. 언젠가 반드시 저런 식으로 집을 꾸며봐야겠다. 20세기 후반의 대만 분위기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중간중간 번역은 좀 이상했다.



*이강인. 2009. “대만 영화의 뉴웨이브 운동과 정치성에 관한 담론”.

**박선영. 2011. <기형도: 균열과 환상, 생의 본연을 선회하는 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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