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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COCO Dec 08. 2023

영화 <서울의 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면

그 많은 죽음에 누구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불과 40여 년 전의 이야기다. 군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를 규합해 서울로 탱크를 몰고 들어오고 총으로 사람들을 쏴 죽였다. 그게 겨우 40년 전의 이야기다. 사람들을 잡아 마음대로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다. 단체로 저항하면 군대가 동원돼서 밀어버렸다. 겨우 40년 전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지금은 그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을까.


<서울의 봄>을 같이 본 친구는 공교롭게도 전 씨 성을 가지고 있다. 극장을 나서면서 “아우, 열받아”를 되뇌는 친구에게 농담으로 물었다.


“혹시 먼 친척이라든가 뭔가 관련 있는 거 아니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전 씨 친구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에 네가 태어났는데 할아버지가 전두환이었어. 그럼 어땠을 것 같아?”


농담 반 진담 반. 정말 그럼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어려서부터 주어진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족과 일가친척은 물론 어울리는 사람들 모두 엄청나게 부유하고 소위 말하는 금수저, 다이아수저라 불리면서 그 안온함이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사람들이 “전두환”에 대해 오래되고 사라지지 않는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인터넷 뉴스와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전두환 일가에 대한 증오와 끈질긴 추궁, 원색적인 욕설을 보고 듣고 읽었을 것이다. 때때로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저 새끼 전두환 손자래.”라며 지나가는 무리의 눈빛에서 더럽고 추한 것을 흘겨보는 싸늘함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왜 내가 “전두환 일가”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욕을 먹어야 하는지 억울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두환의 손자가 유튜브에 올려놓은 ‘우리 일가를 고발한다’는 영상을 봤다. 그의 분노는 다소 엉뚱한 방향이었지만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정도가 그가 받은 너무 작은 벌이었나 싶다.


-


그 시절, 그곳에서


나와 당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영화 속에 그려진 하나회 인물들. 그들은 특별히 나쁘지도 괴물도 아니다. 평범한 인간들이다. 잘 살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내 마누라와 자식들을 건사해려 지위를 보전해야 하는 가장들이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힘 있는 편에 속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이다.


그 시절, 육사 생도인 당신에게 누군가 하나회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다면 어땠을까. 기쁘지 않았을까?

박정희가 비호하는 최정예 소수 엘리트 집단에 선택되었을 때 “어우, 저는 생각 없습니다.”라며 손사래 쳤을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과업인 젊은이에게 성공의 하이스패스인 하나회 입회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본다.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형편에 먼 친척 어른이 고위직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렸다. 감사하게도 내 자식을 지방 관공서에 한 자리를 만들어 취직시켜주겠다고 한다. 집안 어른의 마음씀에 감사하며 너도 언제든 기회가 있으면 그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을 것이다. 아들이 일하면서 알게 된 도시 개발 정보로 알음알음 우리 집과 동생들은 재산을 쌓았다. 고위직 어른에게는 물론 때마다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언제든 그분이 원하는 정보는 어떻게든 전달해 드렸고 누가 되지 않게 처신했다. 그렇게 우리 집안은 일어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손에 들린 총. 이 총으로 저 사람들을 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무섭고 떨린다. 내가 사람을 죽인다니. 북한군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데 내가 저 사람을 쏴 죽여야 한다. 내가 이러려고 군대에 온 게 아닌데. 군인이 된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총알은 내 머리에 박힐 수도 있다. 죽지 않더라도 어디로 끌려가 죽기 직전까지 맞고 반병신이 될 것이 뻔하다. 쏴야 한다. 생각하면 안 된다. 쏴야 한다.


”너라면 안 그럴 자신 있어? 인간 다 똑같아.”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며, 너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합리적이고 본능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도덕은 힘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족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가족을 파탄내고 죽이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 내 사람에게 좋은 직장을 잡아주기 위해 정당하게 노력해서 기회를 두고 경쟁하는 누군가를 부당하게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관리의 직책을 부여받고도 국민들을 기만하고 내 주머니 챙기는데 급급해서는 안된다.


나의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시민을 향해 총을 발포하는 명령을 내리는 자는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군주제의 왕이 되겠다는 욕망을 가졌을 뿐이다. 그것은 사기이고 기망이다. 조금도 합리화할 수 없다. 죽음의 공포로 사람들을 밀어 넣고 자신의 뜻을 따르게 만드는 것은 악인이다. 내가 죽을 것이냐, 남을 죽일 것이냐로 모든 선택을 생존의 문제로 끌어내려 그 많은 사람들을 악인이 되기 만들었기에 전두환은 더 지독한 악인이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상식이던 시절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불쾌한 생각이 매일매일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던 시간이 있었다.

이 영화를 보았을 그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 시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들 그러니까,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어서, 내 가족을 위해, 먹고살려고

도덕이나 신념 같은 허황된 것은 내다 버리는 선택을 했다.

하나를 뽑아내면 고구마처럼 우르르 딸려 나오는 부정부패로 얽힌 관계들이 얼마나 넓게 퍼져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크게 해먹은 놈, 적당히 해먹은 놈, 이 정도는 해 먹은 것도 아니라며 소박하게 해먹은 놈,

친인척이 해 먹는 거 모른 척 한 놈, 해먹을 능력도 없어서 주인만 바라보던 개 같은 놈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말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했다는 변명이 왜 구차한가. 죽음 앞에 초연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이 하나도 없을 만큼 살아남는데 급급했던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직도 그 시절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도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나섰다가도 그 많은 놈들에게 다시 짓밟혀서.





아마도 40년 후에 지금을 돌이켜보며 어떻게 그것이 상식이었을까 황당해하며 회고할 날이 올 것이다.


어떻게 부의 대부분을 극소수가 독점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걱정하며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을까.

어떻게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그 분노를 남녀로 편을 갈라 서로를 미워하는 것으로 표출했을까.

어떻게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한심한 수준이었을까.  

어떻게 국민들은 그들을 심판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갔을까.



40년 뒤 어떤 영화가 만들어져서 지금을 황당한 시선으로 돌아볼지 기대된다.  

그 영화에 등장하게 될 인물들이 누구일지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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