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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허락의 은유–《렛 미 인》을 보고

Let The Right One In 2008 스웨덴

by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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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허락의 은유 – 《렛 미 인》을 보고


눈이 조용히 내리던 밤, 외로운 소년 오스칼은 새로 이사 온 소녀 이엘리를 만난다. “12살, 그리고 여덟 달 아홉 날을 더 산” 어느 날의 만남. 그렇게 시작된 이 관계는, 처음엔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라는 익숙한 서사를 따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렛 미 인》은 '뱀파이어'라는 신화를 빌려, 경계에 선 존재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맺는 관계의 윤리와 감정의 불균형을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묻는다.


“들어가도 될까요?” – 허락과 경계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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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는 초대받지 않으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전설적 설정을 넘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이 된다. ‘Let the right one in’, 올바른 자에게만 문을 열라는 제목처럼,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누가 그 ‘올바른 자’인가? 그리고 무엇이 허락이고, 무엇이 침범인가?


이엘리는 오스칼에게 직접 묻는다. “문을 열어도 될까?” 오스칼은 초대를 망설이다 결국 문을 열어준다. 이 순간, 둘 사이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우정이 아닌, 한 사람의 ‘허락’을 통해 타인의 삶에 깊이 들어서는 행위. 하지만 과연, 오스칼은 그 초대가 가진 무게를 완전히 이해했을까?


사랑인가, 착취인가 – 관계의 윤리적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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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리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다. 그녀는 단순한 ‘소년의 첫사랑’이 아니다. 그는 외로움에 목마른 아이였고, 그녀는 피에 목마른 존재였다. 오스칼은 그녀로 인해 용기를 얻고, 세상에 맞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엘리는 그의 내면 깊숙이 침투해간다.


마지막 장면, 오스칼은 이엘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난다. 어딘가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은 희미하게 굳어 있다. 마치 《졸업》의 마지막 장면처럼, 순간의 충동이 지나간 뒤 찾아오는 침묵. 우리는 묻게 된다. 이 관계는 정말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착취의 변형이었을까?


이엘리는 이전에도 ‘보호자’를 두고 있었다. 피를 구해다 주던 중년 남자. 그는 이미 늙었고, 소진되어 있었다. 이엘리는 이제 오스칼을 새롭게 선택한다. 새로운 ‘파트너’, 어쩌면 새로운 ‘수단’. 이 점에서, 이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 순환에 가까워 보인다. 역할은 바뀌었고, 착취는 재구성되었다.


경계인으로서의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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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리는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는 존재다. 어린 소녀의 육체를 가졌지만, 소녀가 아니며, 인간도 아니다. 낮을 피해 숨어 지내고, 피를 먹지 않으면 몸에서 냄새가 나며, 사회적으로 어떤 구조 안에도 들어갈 수 없다. 오스칼은 사회의 주변부에 밀려난 왕따 소년이다. 그 역시 경계에 있다.


이 두 존재가 서로에게 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서로의 고독과 결핍을 닮았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그래서 따뜻하고, 동시에 위험하다. 외로움은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 있지만, 때로는 ‘구원받고 싶다’는 간절함이 관계의 권력 구도를 흐리게 만든다. 누군가는 목마르고, 누군가는 마실 것을 쥐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구조다.


“Let the right one in” – 초대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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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결국 열렸다. 오스칼은 이엘리를 들였다.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이전의 자신이 아니다. 타인의 피를 받아먹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도 그 그림자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엘리는 분명 허락을 구했다. 문을 스스로 열라고 말했고, 오스칼은 열었다. 따라서 이 관계의 책임은 누구의 것일까?


초대는 단순한 수용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고, 동의이며, 그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다. 영화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그 애매함과 무게만을 남긴다.


맺으며 –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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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은 잔혹한 사랑 이야기다. 뱀파이어와 인간 소년이라는 소재가 만들어내는 환상성 이면에는, ‘관계’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모든 관계는 경계 위에 존재한다. 누구를 들일 것인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침범인지—그 판단은 언제나 어렵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래도록 남는다. 피로 얼룩진 눈길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아이의 눈빛처럼. 잔혹하지만 순수한, 고요하지만 무서운,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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