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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동의해야만 한다” – 공포와 에로티시즘 사이,

by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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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노스페라투》가 개봉했다. 독일 표현주의의 시작점이자 고딕 호러의 정점이라 불리던 1922년작 《노스페라투: 공포의 교향곡》의 리메이크. 오리지널의 그늘 아래 선 작품이 이토록 자신만의 그림자를 드리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한 오마주나 스타일리시한 모방을 넘어서, 원작의 고전적 공포에 에로티시즘과 심리적 압박을 정교하게 덧대어, 새로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나 역시 이 영화를 작년 겨울, 여자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봤다. 사실 킬링타임에 가깝게 골랐던 영화였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운이 깊다. 잊히지 않는 미장센, 낡은 고성의 침묵, 긴장과 고요의 균열. 왜 그토록 인상 깊었는지를 떠올려보면, 무엇보다 '무언가를 억지로 보여주지 않는 공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대부분의 호러 영화가 보게 하려는 공포라면, 이 영화는 느끼게 하는 공포다. 말없는 그림자, 허락을 구하는 괴물, 피와 침묵 사이의 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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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존재에게 ‘초대’가 필요하다는 설정은 뱀파이어 장르의 핵심 중 하나다. 《렛 미 인》에서처럼, 《노스페라투》의 올록 백작 역시 그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가 동의해야만 한다.”


이 대사는 단순한 설정 이상의 것을 품고 있다.


공포란, 외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힘이 아니라, 문을 열게 만드는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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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올록은 단순한 포식자가 아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잊고 살아가려는 엘렌에게 “당신이 나를 불렀다”고 말한다. 억압된 욕망, 질서로 통제된 삶에 파고드는 혼돈의 상징. 동시에, 그의 접근 방식은 부드럽고 치밀하며, 계약이라는 형식을 빌려 정당성을 가장한다. 현대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 관계는 분명히 모호하다. 사랑인가, 착취인가. 유혹인가, 강제인가.


엘렌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 갈구하는 듯한 시선, 저항과 허락 사이를 오가는 감정. 그 자체가 고딕 로맨스의 본질이다. 우리가 흔히 ‘미녀와 야수’의 판타지로 정리해버리는 관계는, 실은 근대적 이성과 충동 사이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잔향이다. 위험한 존재에 대한 끌림. 통제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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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올록은 단지 악마가 아니다. 오히려 엘렌은 그를 불러낸 자다. 그녀의 기도, 그녀의 결핍이, 그를 끌어온다.


이 허락의 구조는 관객의 감정도 양분시킨다. 우리는 엘렌이 무력하게 끌려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어딘가에서 그녀와 함께 문을 열어젖히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왜냐하면, 올록은 단지 괴물이 아니라 근대적 삶의 바깥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그림자, 피의 향기, 검은 망토, 그리고 벗어나고 싶은 억압된 일상. 이 모든 것들이 올록이라는 존재 하나로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엘렌은 끝내 문을 연다.


그림자와 불빛, 이성과 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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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에거스 감독은 1830년대 독일의 디테일을 살려냈다. 부동산업자 토마스, 심령술과 정신분석을 오가는 박사들, 그리고 퇴마에 의존하는 종교적 권위자들. 이성적 질서로 포장된 근대는 위기 앞에서 무기력하다. 사업가 프란츠는 위기가 닥치자 가장 먼저 무녀를 찾고, 박사들은 서로를 사이비로 매도하며 무너진다.


그 모든 틈 사이로, ‘그림자’는 기어든다. 실제 쥐 2,000마리, 비둘기를 물어뜯는 장면, 4시간짜리 특수 분장을 감내한 빌 스카스가드… 공포의 물리적 묘사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아름답다. 어둠 속에서 울리는 피아노, 엘렌의 고딕 드레스, 그리고 흐느낌 같은 올록의 속삭임. 그것은 ‘무섭다’기보다, ‘벗어날 수 없다’는 느낌이다. 마치 아름답고 기괴한 꿈처럼.


총평 –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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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페라투》는 단순한 뱀파이어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그림자를 더듬는 이야기다. 문을 두드리는 존재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억누른 욕망, 잊으려 한 기억, 외면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문을 열기 전까지는 들어올 수 없다. 우리가 문을 열기 전까지는.


엘렌은 결국 허락했다. 그리고 올록은 들어왔다.


그 끝에서, 관객은 묻는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문을 열어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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