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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r 09. 2020

 집 '밖'의 여성들  

노키드존과 여성의 장소에 관하여

 어떤 책은 처음 읽을 때와 시간이 흐른 후 읽는 것이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분명 완독한 책임에도 감명 깊었던 구절의 앞뒤로 새삼스럽게 밑줄을 다시 긁을 때 새삼스레 책의 힘을 느끼는 것이 그렇다. 그러는 요즘, 코로나 때문에 밖에 잘 나가지도 못하고 새삼스레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또 읽는 것을 반복하는 요즈음, 새삼스레 콕콕 박히는 구절로 가득한 책이 있다. 책의 이름은 <사람, 장소, 환대>. 2019년 참여했던 <경기 아카이브_지금,>전시에서 문학위원이셨던 고영직 선생님이 추천해주셔서 당시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분명 그때도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어쩐지 요즘은 다시 또 다르게만 읽힌다. 그래서 책의 절반정도에 밑줄을 긁고 나서야 서툴게 그 기분을 글로 적어보는 것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2015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쉽게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타인의 환대 속에서만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成員權,membership; 구성원 자격. 회원자격)을 확인할 수 있다. (34쪽) 작가는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이 조건적이라는 예시를 들고 다음 장인 [오염과 메타포]에서 성원권의 문제는 부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의 문제라고 언급한다. (38쪽) 이어지는 설명에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는 남성에게 속해있으며, 과거 여성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하고 다방이나 술집은 말할 것도 없이 음식점을 이용할 때조차 금기의 벽을 느끼던 것을 설명한다. 이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여성의 공간을 집‘안’으로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죽어있도록 지시한 것과 연결되는데, 집’밖‘에서 여성은 비가시화된 존재이며, 여성이 사회에서 ’보이기‘시작한 때는 여성은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소를 어지르는 존재로 치부됐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분명 과거의 여성을 서술하는 것일텐데, 그리 낯설지 않다. 여성은 언뜻 ’된장녀‘ 이미지에 분노하며 자신만의 공간과 사회적 지위를 찾아가는 듯하지만, 여전히 어떤 장소에서는 배제되고 있다. 바로 ’노키드존(No Kids Zone)‘이다.

네이버 웹툰 <아이키우는만화>. 이번화 '노키드존'에서는 평소 별점에 비해 별점이 매우 떨어졌다.

 실은 어제 잠에 들기 전 우연히 보게 된 웹툰의 주제가 ‘노키드존(No Kids Zone)’이었다. <아이키우는만화>는 제목에 충실하게도 순수미술을 전공한 작가가 아이를 키우며 마주하는 세상에 대해 다룬다. 이번 화인 ‘노키드존(No Kids Zone)’은 자신이 아이와 동행할 때 종종 마주하는 ‘노키드존(No Kids Zone)’ 가게들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어린이들에게 너그러운 세상을 바란다며 웹툰을 마무리했지만, 이번 화는 평상시 별점에 비해 2점이나 떨어졌고, 평소보다 4배가량의 댓글이 달렸다. 많은 댓글에서는 여전히 개념이 없는 부모를 지적하거나 자신이 목격하거나 들었던 ‘무개념’ 부모의(주로 ‘모’의) 행동들에 대해 풀어놓는다. 결론은 아이를 모두 교육한 후에 공적인 장소에 나와야 하며, 키즈카페같이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 가는 것을 완곡하게, 때로는 아주 직설적이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이러하 논리에 의한다면, 아이와 양육자는 공공시설의 이용에 명백히 제외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제외된 이들은 ‘비가시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집‘밖’을 나섰을 때는 <사람, 장소, 환대>에서 다뤘던 것처럼 ‘깨끗하지 못한 더러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도시괴담처럼 삽시간에 확산된다. 모두가 비슷한 경험을 쏟아낸다. 그것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제 3자가 저지른 경험임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키드존(No Kids Zone)’은 경험의 자유에 대한 욕망과 부딪쳐버리고야 만다. 음식과 음료를 마시고자 선택한 이들의 ‘자유’를 위해서는 마치 대안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양육자에게 단 두가지 선택만을 강요한다. 집‘안’에 있거나 아이들만 있는 장소에 있기를.

 <사람, 장소, 환대>에서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으며,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임을 강조한다. (39쪽) 앞서 말한 것처럼 현재는 점차 이러한 이미지를 여성 스스로 깨고있는 듯하나, 여전히 일부 여성들은 집 밖에선 보이지 않도록 살고 있다. 때로는 본인도 그런 폭력적인 시선에 가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가 약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란 이들이 나중에 기술에 도태된 노인들을 배제하는 ‘노시니어존’을 만들 수 있다는 가정 때문에 ‘노키드존(No Kids Zone)’이 부당하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제외하고서라도 주 양육자가 여성인 이 사회에서 적어도 그들이 아이라는 미성숙한 인간을 동반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당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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