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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Oct 23. 2021

서정주 - 고창/부안 (1)

거기서 쓴 일기 


2019년 2월 26일 씀





처음엔,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곤 다시 잤다. 그 다음엔, 6시 50분, 그리고 8시 10분. 조식 시간은 9시고, 버스는 9시 35분이니 서둘러야지 싶어 일어나 샤워를 했다. 들여다보기엔 너무 멀긴 해도 투명한 유리창이 신경 쓰여 수건으로 가려두고, 챙겨온 이솝 어메니티와 경희가 준 몰트 브라운 바디워시를 앙증맞은 나무 선반 위에 올려두고서. 수압이 아주 세고, 따뜻한 물도 잘 나와 퍽 만족스러웠다.



라디오의 LCD가 보여주는 시각이 어쩐지 간당간당하여, 조식은 포기해야겠구나 하고 집을 나서려니 휴대전화가 알려주는 시각은 8시 52분. 틀린 시간을 알려주어 고마워,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오늘의 조식은 샌드위치. 삼각형 모양으로 2등분 되어 있어 교정 중이라 작게 잘라달라고 부탁 드렸다. 그랬더니 또 정말로 조각 조각 내주셨다. 커피도 맛있고, 너무 작아 별달리 기대를 않았던 귤까지도 어쩜 이리 달고 맛있는지.


그럴 듯하게 배를 채우고 버스를 기다렸다. 방의 일기장에서 읽었는데, 이 방 밖으로 남실거리는 바다 너머가 고창이란다. 어제는 저 멀리 가로등 빛을 길게 머금어 드리울 정도로 가득 차 있던 바닷물들이 어쩜 그렇게 눈인사 한번 없이 이리 떠나가버렸나 섭섭했다. 콧잔등이 듬성듬성 훤히 드러난 바다.



버스엔 나까지 세 명이다. 천원을 내고 다시 한번 줄포까지 천원 맞아요? 했다. 이미 타고 있던 아저씨와 나와 같이 탄 아주머니는 오메 하면서 반가워한다. 아저씨는 내소사에 가는 길이시란다. 방에 놓인 일기장에서 읽었던 곳. 논도, 갯벌도 모두 넓고 평평하다. 평평한 땅이라 직사각형 아니면 정사각형 모양이다. 나는 내 고향의 논들을 생각한다. 한 귀퉁이가 찌그러지거나 우글거리는 논들을. 새로 시멘을 발라 넓힌 농로가 생기기 전엔 좁고 꼬불꼬불한 흙길을 양팔 벌려 걷곤 했다. 그리고 중간에 흙이 무너져 기우뚱.


어제 부안 터미널에 도착한 건 6시반께, 아직 그다지 어둡지도 않았으나 이미 막차는 끊겨있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탔고 높지 않은 산들에 대해 기사님께 말을 걸었다. 기사님은 부안 출신으로, 서울에서 일하다 도로 부안에 내려온 사람이었다. 내려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행복하다고. 이 곳은 내 행복한 어린 시절의 풍경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이 동네 가게 이름들이 재미있다. 외할머니 마당, 장모님 젓갈. 과수원의 키 작은 나무들, 벌써 삶아놓은 논. 파 밭에 씌워둔 동그란 구멍이 뚫린 투명한 비닐. 쉬지 않고 등장하는 온갖 젓갈 식당과 직판장을 보며 젓갈이 이렇게나 대중적인 음식인가 의아해하던 차에 줄포터미널에 도착했다.



흥덕으로 가서, 선운리 가는 버스를 또 갈아타야하는데, 일단 흥덕 가는 버스가 3시간 뒤에 있었다. 터미널도 두 군데였다. 조금 헤매다가, 택시를 타기로 마음 먹고 카카오 택시를 불렀는데 희한하게 14분 거리에 있는 택시가 잡혔다. 그리고 난 타지도 않았는데 탑승 안내가 날아오고? 알고 보니 내 경로는 기사들에게 썩 매력적이지 않았고, 기사님 역시도 아내분이 실수로 수락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담 난 참 운이 좋았구나.


평평하고 네모난 논들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기사님은 사방이 다 간척지라 그렇다고 했다. 어릴 적, 지금 차가 달리고 있는 이 땅은 원래 바다였다고. 그래서 그렇게 반듯 반듯했구나. 아주 시뻘겋고 좋은 황토가 온 밭에 널려있었는데, 이 곳의 천연 황토라고 했다. 육답보다 해답의 쌀이 더 맛좋다고도 했다. 기사님은 서정주 생가에 들른 후 선운사에 가려는 내가, 보나마나 또 마땅한 교통편을 찾기 어려울 거라고 13,000원을 제안했다.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기사님 명함을 받고 생가에 내렸다.




생가는 너무나 평범한 시골 마을의 어느 한 집이었다. 초가집 두 채가 깔끔하게 서 있었다. 아크릴 판 세 군데에 국화 옆에서, 선운사 동구, 동천이 쓰여 있었다. 국화 옆에서와 동천은 내가 좋아하는 시였고 선운사 동구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는데 역시나 좋았다. 툇마루에 앉아, 가져온 카메라와 삼각대를 요리조리 만져가며 셀프 타이머로 사진을 찍었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는 시늉을 해보기도 하고, 분명 시인도 어린 시절 그래보았을, 대들보에 기대어도 보고. 혼자서 이렇게 폴짝폴짝 뛰면서 사진을 찍는 건 처음이었는데 무척 즐거웠다. 정작 내가 궁금했던 빨랫줄은 도통 어떻게 걸려있었을까 상상하기가 어려웠지만.


개 짖는 소리가 들려 혹시라도 목줄이 풀린 개가 있으면 어쩌나 싶어 겁을 내며 문학관으로 갔다. 가는 길에 강아지-개 중간의 백구 두 마리가 있었는데, 만져보고 싶었지만 쫑쫑쫑 하는 소리에 호기심을 보이기만 하고 다가오지는 않아 그만두었다. 우리 둘다 겁쟁이구나. 문학관의 넓은 마당에 잠시 감탄했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분이 천천히 보시고, 시간 있으면 차 한 잔 내드리겠다고 해서 감사하다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사실 시인의 생애와 유명한 시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새로운 시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특히 시인이 자기 부인의 이름과 옥수수를 좋아하는 점을 버무려 쓴 시에서는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어서, 또 받고 싶어서. 층계의 옆면에는 시인이 말년에 기억력 감퇴를 위해 외웠다는 전세계 1600여개의 산들이 사진과 그 밑에 시인의 친필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꼭대기 마지막 층계 옆은 에베레스트. 시인이 산 이름을 외웠던 것은 몸이 아닌 정신으로 해낸 등반이라는 비평이 있었는데, 층계를 ‘오르며’ 나도 함께 한 기분이 들게 해주었다.




꼭대기엔 자화상이 액자에 걸려있다. 옆엔 전망대라는 표지가 붙은 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사방이 나무로 길게 막히고 사각형 원형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전망대. 그리고 또 계단을 오르면, 내 가슴보다 조금 낮은 난간이 있고 불어오는 바람이 내 몸을 속속 만지고 갈 수 있을만큼 높고 트인 공간이 나온다. 생가가 보이려나 가까이 다가가니 난간에 새겨진 글자. 빈 집에는 다섯살 짜리 나 혼자 뿐. 저 집에 다섯살 짜리 시인이 혼자 있구나, 아직도. 한 3가지의 구절들이 난간 모서리마다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도로 내려오는데, 영상 감상실이 있어 흘끗 하곤 지나치는데 갑자기 영상이 큰 소리로 재생되었다. 아, 씨씨티비가 있나? 하고 웃으며 들어가 첫째줄 중앙에 앉아 감상 시작. 시인이 신라 시대의 이야기까지도 시의 재료로 삼을 수 있었던 건, 외할머니가 해주셨던 옛날 이야기 덕분이구나 새로 알게 되어 유익했다. 그냥 돌아가긴 아쉬워, 못 봤던 시가 꽤 실려있었던 만원짜리 책을 사려고 여쭈어봤는데 차 한 잔 하고 가실래요 하셔서 네 하곤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 분은 약 두 시간에 걸쳐 시와 시인과 이 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해주셨다. 그 시간이 너무나 꿈결같고 황홀했다.



심지어 선운사까지 태워주시겠다고. 성함을 여쭤보고 싶었던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제 이름은 ...이에요. 하시기까지. 나는 이 분이 해준 동백꽃 이야기가 퍽 마음에 들어서, 돌아가면 매조화와 동박새의 그림을 그려 소포로 선물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수 송창식이 선운사 주최로 열렸던 음악회에서 시인의 시에 음을 붙인 ‘푸르른 날은’을 불렀던 그 밤의 이슬과 목소리를 떠올리는 그 행복한 얼굴을 보며 예술의 가치를 되새겼다. 내게 꼭 좋은 시인이 되라고 하셨다.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이종훈 교수님 이후로 처음이었다.


 고운 분 만나 복된 시간 보냈다고 하셨는데 그대로 되돌려드려도 감사한 마음에 모자랐다.




감사히 내려선, 부지런히 걸어 선운사에까지 쉽게 당도했다. 무언가 살 만한 게 있을까 했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팔찌라도 하나 살까 싶었지만 칭청산에서 샀던 팔찌가 행방불명된 지도 어언... 춘동백이라 3월이 지나야 핀다던, 천연기념물인 절 뒷편 동백 나무 쪽을 가보니 역시 굵은 알알이 맺혀 얼마나 예쁠지 능히 짐작은 가도 피어있진 않았다. 단단하고 둥근 꽃 구슬. 슬쩍 슬쩍 법당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한번은 천장을 가득 메운 연등과 그 밑의 이름들이 바람에 흔들려 두두둥 소리를 내고 그 아래로 보이는 금빛의 얼굴이 묘했다. 마치 이 수많은 염원들을 능히 품고도 평정을 유지하는 내면의 강인함이 눈빛 속에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이름표가 바람에 아무리 일렁여도, 고요한 수면처럼 보이는 그 표정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리곤 복분자 주스를 마시고 (아주 맛있었다!) 버스를 기다렸다가 흥덕에서 하차. 줄포가는 버스 티켓을 끊었는데 날짜만 적혀있고 시간도, 승차홈도 안 적혀 있어서 당황해하며 주변 아주머니들께 여쭤보고 간신히 승차. 줄포에서 내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내가 다른 터미널에서 기다렸단 걸 깨닫고 올바로 된 터미널에서 기다렸는데 작당 마을 가는 건 1시간 뒤에나 온단 말에 결국 택시를 탔다. 노을이 예뻐 사진을 찍었는데, 호스트 아저씨께서 포구까지 가서 보면 더 예쁘다고 알려주셔서 짐 풀고 포구로 갔다. 갈매기 소리,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소리, 곱게 색으로 물든 하늘... 산과 물이 어우러진 이 동네가 참 아름답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선 드립 커피 도구들과 텀블러를 챙겨 공용 키친으로 갔다. 설거지하고, 아침에 냉장고에 넣어뒀던 우유를 꺼내오려고. 아저씨가 뭔가 하고 계시길래 알려주신대로 가봤는데 너무 예뻤노라고 기쁘게 말씀 드렸다. 그리고 직접 볶은 원두를 좀 얻어왔다. 세 잔 분량이라고, 필요하면 언제든 더 달라고 말하라셨는데 과연 잘 내려서 세 잔을 마실 수 있을까? 방에 있는 라디오엔 재즈가 들어있는데, 반복 재생으로 듣고 또 들어도 참 듣기 좋다. 낮은 조도도 맘에 들고, 작아서 금세 훈훈해지는 것도 좋다. 이 작은 침대도 좋다. 의자를 옮겨 앉으면 바다가 보이는 것도 좋다. 아직 이 방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꼭 다시 와야지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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