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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Oct 30. 2021

이국종 <골든 아워>

단지 생명을 구하자고

작성일 : 2019년 1월 5일


- 이렇게 길고 개인적인 독후감은 인스타가 아니라 블로그에 쓰지만 굳이 올리는 이유는,  역시 덴마 작가인 양영순님의 인스타 피드에서  책과 후원 방법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내게 그랬듯 누군가에게도,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깊은 울림이 되었으면 해서. / /


4시간을 꼬박 암체어에 앉아 책을 주룩주룩 읽어내려갔다. 눈앞에 톡 톡 튀어나온 잔가지를 자르고 보란듯이 잎과 꽃을 가꾸기만 해도 사실은 충분했는데, 굳이나 흙을 헤쳐가며 뿌리를 살피고자 하는 그 숭고한 마음에 자못 경외감이 든다. /


꽤 오래 전, 이 분의 세바시 강연을 들으며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강연 주제가 의사로서의 소명 의식이나 환자를 소생시킨 기적적인 에피소드일거라고 짐작했는데, 뜻밖에도 그의 화제는 중증 외상 환자는 환자가 되기 전에 뭘 하던 사람들이었나였다. 그리고 그것이, 어째서 시스템이 이리도 열악한가에 대한 이유로 똑딱이처럼 꼭 들어맞았다. 강연의 제목은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였다. /


내가 일하다가 갑작스레 치명적인 외상을 입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최근에 죽고만 그 가여운 친구는 그런 위험이 상존하는 환경에서 매일 일해야했다. 사실 뿌리를 파내려가다 파내려가다 보면 결국은 이상향을 그려버리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대학 시절 현실정치보다 정치철학에 몰입했던 이유일지 모른다. /


실제 사업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매기고, 예산 배정에 있어 효율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기업이나 국가나 같다. 내게는 그것이, 도무지 손댈 엄두조차 나지 않게 마구 꼬여버린 줄과 같이 느껴져서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공들여 풀어야할지 생각하는 일조차 어려웠다. 남겨진 꼬인 줄에 가까스로 매달린 사람들이 떠오르니까... 나는 철학자들을 참 좋아했지만, 때로는 어지러운 사회에서 이리로 도망쳐와 나홀로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인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


이 분은 중증 외상 환자가 될 위험에 노출된 이들의 삶을 위해 투쟁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생명을 구하자고 외치고 있다. 딱 내가 할 수 있는 일만큼만. 안주하지도, 자포자기하지도 않고 그저 제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절규가 어쩌면 이리도 생생하게 들릴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치열하게 일하고 있는 이 분과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 생명을 향한 맹목적인 노력이. /


나는 늘 내가 노동자와 농촌과 가난한 사람들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아픔에 더 잘 공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내가 얼마나 윤택하게 살아왔나를 실감하게 된다. 내가 고3 때 안 풀리는 문제를 두고 머리를 꾹꾹 누르던 그 순간, 누군가는 머리를 그러쥐고 부모님께 얻어맞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시절 빵집에서 용돈 벌이 아르바이트를 할 때, 누군가는 제 용돈은커녕 아픈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


좋아하는 테드 영상 중에 Beauty of working for free 라는 게 있는데, 강연자인 Aran Kim이 홈리스 시설에서 봉사를 하면서 느꼈던 고뇌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신발이 하나 뿐이어서, 그 신발을 잃어버려서 하루종일 집에 있어야 했던 것은 왜 내가 아니고 그 홈리스 소녀지? 왜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자신이 누리는 이 상대적인 혜택의 사유를, 그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갖는 책임감에서 찾는다. 그리고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


크게 다칠  있었던   누구가 아니라 나였을 지도 모른다. 밤새 배달 오토바이를 타야했던 , 한순간 설비에 손이 말려들어간 , 뜻밖의 뺑소니 사고를 당하고  - 우연한 행복으로  평탄한 안전을 누리고 있는 나를 아무 이유없이 비껴가 아무 이유없이 남에게 닥쳐온 불행인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이유없이 어느 순간 내게 꽂힐 지도 모를. /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고, 연설가는 마음을 일깨우고, 당장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돈을 얼마나 많이 가져야할까에 대해 오래 전 스스로 내린 정의가 있었는데, '어떤 물건을 보고 누군가가 바로 떠올랐을 때 그걸 기쁘게 선물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제는 '필요한 곳에 기꺼이 지속적인 경제적 도움을 보탤 수 있는 정도'라고 하자. 그리고 새해 목표에 봉사 활동 계획을 한 줄 더 써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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