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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Mar 25. 2022

베르톨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 30년 종교전쟁의 한 연대기


나는 때때로 포장마차를 끌고 지옥을 지나면서 역청을 팔거나, 아니면 천국을 지나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노자 양식을 파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해요. 총질 안 하는 곳만 있다면 살아남은 내 자식들을 데리고 몇 해 더 조용히 살고 싶어요. - 억척어멈의 말 중에서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쓰인 희곡이다. 30년 전쟁은 명분상으로는 신교-구교 간의 충돌이 배경이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일단락 되었다. 대학 시절 거의 정치 사상에 치중하고 외교 강의는 많이 안 들었는데, 베스트팔렌 조약을 보자마자 최초의 근대적 협약이라 떠오르는 게 용하다. 억척어멈과 주변 인물들이 속한 군대는 스웨덴 군대로 신교 쪽이다.


 억척어멈은 포장 마차를 밀어가며 이 전쟁의 포화 속을 거침없이 누비는 인물이다. 떼온 물건도, 시체에서 벗긴 물건도 가리지 않고 팔아제낀다. 그녀에겐 아버지가 다 다른 세 자식이 있는데, 각각 아일립, 슈바이처카스, 카트린이다. 억척어멈은 전황이야 어찌 됐든 자식들만 잘 건사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장남 아일립은 대담하고 약았고, 차남 슈바이처카스는 어리석지만 정직하며, 딸 카트린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벙어리라 말을 못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희곡이라 정리하기에 편하니, 모처럼 줄거리도 적어본다.




 억척 어멈이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아일립은 모병관의 꼬임에 감화되어 마차를 떠나 입대한다. 그 후, 닭을 팔려고 흥정하던 억척어멈은 우연히 천막 너머에서 아일립의 목소리를 듣는다. 들려오는 대화는, 아일립이 폭력을 행사해 소고기를 구해온 것에 대한 용병대장의 치하였다.


용병대장 : ... 내 부하들 중에 아직도 순수한 신앙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 영혼을 인도하시는 목자께서는 보고만 있구먼. 설교나 할 줄 알지 어떻게 실천하는지는 모르거든. ...
...
군목 : 엄밀히 따진다면, 성서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죠. 하지만 우리 주께서는 빵 다섯 개를 가지고 500개를 만들어 내실 수 있었죠. 그러나 그때는 절박한 경우는 아니었고, 그러니 주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었죠. 사람들이 배가 불렀으니까요. 오늘날이야 다릅니다.


 천막 뒤에서 나타난 어머니를 보고 반가워하는 아일립의 뺨을 억세게 후려치며, 억척어멈은 몸조심을 하지 않았다고 핀란드 악마라 고래고래 호통을 친다.


.


 다시 이어지는 마차를 미는 생활. 불현듯 가까이에 가톨릭 군대가 출몰하고, 다들 혼비백산하는 와중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군목은 황급히 사제복을 벗는다. 연대의 출납계장 노릇을 하던 슈바이처카스는 포로로 잡혀있으면서도, 병사들에게 급료를 제때 지급하지 못해 곤란을 겪을 상사 걱정을 한다. 경악스러운 것은 그 와중에 금고를 잘 챙겨 포장마차에 숨겨두었다는 사실이다.


억척 어멈 : 네 양심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겁이 날 지경이다. 난 너보고 정직하라고 가르쳤다. 한데 그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 저들이 내 장사만 하게 해 주면 그만이야. 장사꾼에게 묻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가격이지. 그리고 신교의 바지도 따뜻하기는 마찬가지.


위험을 경고해주려던 카트린이 아무리 입을 벙긋거려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슈바이처카스는 결국 금고와 함께 발각되어 끌려간다. 억척어멈은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하고, 부랴부랴 바구니에서 기를 꺼낸다. 군목은 제 손으로 가톨릭 군대의 기를 포장마차의 깃대에 맨다. 억척어멈이 슈바이처카스의 목숨값을 몇 차례에 걸쳐 흥정하는 사이, 결국 6발의 총탄이 그의 몸을 통과하고 만다.


.


아일립이 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나타난다. 억척어멈은 잠시 시내에 가 있다. 농가에 침입해 농부의 아내를 죽인 죄목으로 끌려가는 사이, 어머니에게 들른 것이다. 아일립은 전에 하던 일과 다른 일을 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그 때는 전시였고, 지금은 평시일 따름이었다.


.


폐허가 된 농가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앞으로의 전황에 대비해 물건을 떼오려고 억척어멈이 자리를 뜬 사이 카트린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한밤 중에 가톨릭 병사들이 농가에 들이닥쳐 시내로 가는 샛길을 물은 것이다. 농부는 폭력은 견뎠으나 가축을 죽이겠다는 위협에는 이기지 못하고 길을 알려준다. 시내에는 연대가 주둔해있지만 민간인이 더 많다. 농부 부인이 울면서 시내의 어린 애들을 위해 기도하자, 카트린은 돌연 지붕 위로 올라가 울면서 힘차게 북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모두가 당황하여 내려오라고 소리치고, 북을 빼앗으려 애쓰고, 총으로 겁을 줬지만 카트린은 그럴수록 더 가열차게 북소리를 내고 끝내 총에 맞아 쓰러진다. 하지만 그 마지막 북소리는 시내에서의 경보 소리로 이어진다.


.


억척어멈은 아직 아일립이 죽은 줄을 모르고 있다. 이제 혼자서 마차를 밀며, 이야기는 끝난다.  




 희곡답게 매우 상징적인 장치들이 쓰였다. 특히 포장마차라는 공간이 매우 흥미롭다. 어차피 하층민은 평시에도 죽어가는데, 전시라고 해서 나쁠 것이 없으며 오히려 전황이 지난하게 길어질수록 억척어멈의 사업은 번성한다. 30년 전쟁은 과거의 전쟁들과는 달리, 4차에 걸쳐 무려 30년이나 이어졌고 전장은 유럽 전역이었다.


 손으로 힘주어 밀기만 하면 억척어멈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신교 쪽인 스웨덴 연대에 있다가, 가톨릭 군대에 왔을 때는 재빨리 기를 바꿔단다. 구교 사람에게 신교 바지를 입혀도 똑같이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종교가 다 무슨 소용이람. 기병 대장에게 부당함을 항의하러 온 병사에게 건네는 말에서, 억척어멈의 주관을 엿볼 수 있다.  


옳은 말씀이긴 하지만 얼마나 가겠소? 얼마 동안이나 불공평을 견디지 못해요? 한두 시간? 그것 봐요. 스스로 물어보지 않았죠?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오. 왜 그렇죠? 감옥살이는 비참하거든. 그걸 알면 갑자기 불의를 견딜 수 있게 되지요.


 병사가 느끼는 불의가 감옥살이의 비참함에 기꺼이 짓눌릴 수 있듯이, 전쟁마저 불사하게 만드는 이 종교라는 것 역시 목숨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목이 사제복을 갈아입고, 가톨릭 기를 깃대에 매며 자괴감을 느끼는 때에도 억척어멈은 그의 행동을 별달리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동에 있는 이병주 문학관에는 <지리산>의 이 대목이 대문짝만하게 써 있다.


 박태영 "우리는 이미 파르티잔 조차도 아니다. 주의도 있을 수 없고, 이념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끝까지 지리산에 남아 죽음을 한정하고 버티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적에게 항복하여 살 길을 구하는 길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만이 남았을 때, 항복은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만책이 다 끝났을 때 옛날의 영웅호걸들도 항복을 서슴치 않았다. 나폴레옹도 항복을 서슴치 않았다. 이미 당이 없어지고 여러분의 공화국으로부턴 아무런 소식도 지원도 없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자기 목숨 하나를 구하는 것이 지금에 있어선 대사업이다. 지금부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용감해야 겠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 7권 354p~355p


 하지만 그는 끝내 역겨워지고 말았는데, 그건 바로 빌붙어 살던 처지에 억척어멈더러 '전쟁의 하이에나'라 비난했던 바로 그 때였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부득이하게 폭력적인 집단에게 성상납을 하고 얻어온 양식을 여성들이 나눠줬을 때 허겁지겁 씹어 삼키면서도 그녀들을 께름칙하게 여기던 일부 남성들에 대해 느꼈던 그런 감정이다. 소리 내어 욕을 하려거든 떳떳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배설을 위아래로 하는 살덩어리가 되고 말 뿐이다.


 억척어멈의 노래 중, '그리고 정착하는 게 무슨 소용이람? 정착민들이 먼저 죽는데.'하는 가사는 특히나 의미 심장하다.


 정착민들은 땅에 귀속되어 붙박이로 있다. 때문에 표적으로써 매우 적합하고, 그를 피하기 위해선 입장을 택해야 한다. 정착민들은 어제는 가톨릭 기를 달았다 오늘은 프로테스탄트 기를 달았다 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러고도 병사는 '사격 중에 우리가 신교와 구교를 어떻게 구별해 내'하고 팔을 날려버렸지만. 신교와 구교가 땅따먹기를 하면서 세력을 다투는 동안, 억척어멈은 그 두 영역 모두에서 활개를 친다. 마차를 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조롱이나 비아냥을 어차피 억척어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념에 명분을 입혀 두 갈래로 나뉜 인간들은, 억척어멈의 포장마차에서 그저 어떤 바지든지간에 입으면 따뜻함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인간성은 괄괄하고 투박하게 이어져가는 억척어멈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표방된다.




 가장 눈여겨본 인물은 카트린이다. 억척어멈은 자식들을 아끼면서도 무심하기 그지 없다. 카트린이 '갈보년'이 될까봐 조금이라도 치장을 할라치면 호되게 야단을 치고, 전쟁이 끝나고나면 결혼을 시켜주겠다고 달래기 일쑤다. 그러나 어렸을 때 병사가 입에다 뭘 쑤셔넣어 벙어리가 된 일이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고 심지어 얻어맞아 얼굴에 흉이 질 상처가 난 걸 보고도 그 눈치 빠른 억척어멈은 그저 약을 발라줄 뿐 외면한다. 때문에 카트린은 이야기 내내 그저 마차를 함께 밀거나 일을 돕는 소극적 역할로만 다뤄진다.


 마차에 치어 죽은 고슴도치를 간직하거나, 아이 울음소리에 위험을 생각 않고 달려가는 모습에서도 따뜻한 마음씨까지만을 생각했다. 때문에 시내의 어린 아이들을 위한 기도에 - 죽음을 무릅쓰고 지붕 위로 올라가 있는 힘껏 북을 두드리는 모습에서 비춰진 용기가 자못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울면서 세차게 이어가는 북소리는 그동안 내지 못했던 목소리를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듯, 한 맺힌 절규처럼 울려 끝내 시내에까지 전해졌고 내 가슴에도 진한 감동으로 남았다.


 카트린은 전쟁으로부터 빼앗기고 포기 당하며 살아왔다. 어린 시절 목소리를 잃어 둘째 오빠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이베트의 빨간 구두와 모자에 흥미가 있었지만 정작 조금의 단장도 허락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결혼을 시켜주겠다는 엄마의 말씀도, 얼굴에 흉터가 생기는 바람에 여의치 않게 되었다. 심지어 이 순둥이는, 취사병이 억척어멈에게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살림을 차리자고 제안하면서 다만 카트린까지는 좀 어렵겠다고 하는 걸 엿듣곤 마차를 떠나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카트린은 전쟁으로부터 어린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 욕구는 확고히 고수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전쟁에 맞섰고, 마침내 시내의 아이들을 지켜냈다. 그 억척어멈조차도,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다 생각하지만서도 정작 세 자식을 모두 잃어버렸는데 말이다.




 카트린의 모습은 장남 아일립과 더욱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아일립은 영리하고 영웅심이 있어, 입대 후 상관의 칭찬을 곧잘 받게 된다. 그 칭찬의 소재란 가축을 구해오는 것인데, 위 농부가 자기 목숨보다도 가축을 더 중히 여기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 하지만 아일립은 상관의 칭찬에 행동 기준을 두고, 자기 반성이 불가능한 평면적인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상황 파악에 필요한 기민함도 없어서, 관성적으로 행동하다 처형된다. 말미에 이르러서까지도 그 어떤 성찰도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군목은 이야기에서 퇴장하기 전 마지막 대사로 입체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야기 초반)
"난 장작 패는 숙련공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난 사목을 전공했소. 이 곳에선 내 소질이나 능력이 육체적 노동에 오용된다고. 하나님이 내려 주신 재능이 전혀 쓰이질 못한단 말이오. 그건 죄악이라고요. 내가 설교하는 걸 못 들어 보았지요. 설교를 한 번 하면 연대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 놓아 적군을 마치 거세한 숫양들의 무리처럼 보게 할 수 있다고요. 그래서 장병들은 최후의 승리를 성취하고자 자기 생명을 마치 헌 거지발싸개처럼 내던지게 되지요. 하나님은 내게 웅변의 재능을 주셨소. 내가 설교를 하면 당신은 정신을 못 차리게 될 것이오."

(이야기 후반)
"... 내가 거지 신세가 된 후에는 오히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소. 나는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어."


 시험 점수란 10점보다는 100점이 언제나 우월하지만, 인생의 방향이란 10도와 100 사이 우열을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면 사람은 불안해지기 마련이고, 기준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방향이 혹여나 낙제점을 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손쉬운 방안은 아일립처럼 외부에서 찾는 것이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거나, 상사로부터 인정 받거나,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어려운 방안은 스스로가 직접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평가 주체인 자신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두터워야 한다.  둘을 균형 있게 추구하지 못하면, 아일립처럼 외부의 기준에만 몰두하는 기계가 되어버리거나 혹은 자아도취에 빠져 세상 물정 모르는 우물  개구리가   있다.




 이야기의 극초반, 상사와 모병관의 대화에서 이 부분도 눈에 띄었다.


 여긴 너무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도덕심이 어디서 나오겠냐고. 평화란 뒤죽박죽일 뿐이야. 전쟁이 나야 비로소 질서가 잡힌다고. 평화시엔 인간이 그저 종자만 퍼뜨리거든. ... 언젠가 한 70년 동안이나 전쟁이 없었던 지방에 간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름도 없더라니까. 자기가 누군지 모르더라고. 전쟁이 있어야 제대로 된 명단과 호적부가 있고, 그래야만 신발짝 꾸러미도 챙기고 곡식은 자루에 담게 되지 인간과 가축이 똑 부러지게 계산되어서 수송되거든, 질서 없이는 전쟁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호구 조사나 도량형 통일 같은 기본적인 질서는 물론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권위가 필요하다. 어떤 질서가 성공적인가 아닌가는 그 퀄리티보다도 수용과 확산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만큼 강력한 권위는 몹시 드물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목도 물론.


미덕이 아니라 다만 악행만이 수지가 맞지요.


 나는 단기적으로는 악행이 유리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미덕이 더 유용함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미덕을 권하고 타이르며 악행의 유혹을 그저 견디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통해 얻는 이익이 속 빈 강정이 되고 궁극에는 미덕에 의한 혜택이 더욱 크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다. 이것은 나 자신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기 위해 따르고 있는 신념이기도 하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대사로 마무리 해야겠다. 용병대장이 아일립에게, 너에겐 젊은 시저의 기질이 있다며 칭찬하자 그를 엿듣고 있던 억척어멈은 필시 못난 용병대장이라며 중얼거린다. 취사병은 의아해하는데,


"용감한 병사들을 필요로 한다니 말이오. 작전 계획만 잘 짜면 용감한 장병들이 무엇에 필요하겠나? 보통 병사들이면 되지. 대체로 거창한 덕목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게 있다는 증명이거든."

"무엇인가가 잘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무엇인가 그릇되었다는 거요. 왜냐하면, 용병대장이나 왕이 아주 미련해 부하들을 똥통으로 몰아넣기나 하면 부하들은 결사적인 용맹성이 있어야 하지, 그리고 덕목도 있어야 하고. 그자가 너무 인색해서 병사를 너무 적게 모집하면 모두 헤라클레스 같은 용사들이라야 되지. 그리고 그자가 용의주도하지 못하다면 병사들은 뱀처럼 약아야 되지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요. 그자가 병사들에게 늘 무리한 요구를 하면 각별한 충성심도 필요하고. 이 모두 제대로 된 나라나 훌륭한 왕과 대장이라면 필요로 하지 않는 덕목이라오. 나라가 잘되면 덕목이 필요 없어요. 모두 보통 사람이면 되지, 그저 중간 정도의 머리거나 심지어는 겁쟁이라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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