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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Sep 26. 2023

좌절

낙차

- 작성일 : 2022년 8월 7일


인간에게 좌절이란 절대적으로는 환산이 불가능하다. 좌절이란 글자는 세로 모양이고 운동 이후의 정지 상태를 말한다.

완벽과 이상에 대한 희구를 선천적으로 지닌 인간은, 특히 일정 부분 이미 그를 습득했거나 또는 충실한 노력을 들여온 인간일수록 - 추락에 의해 도달하는 위치는 같을지언정 상대적으로 더 큰 낙차로 인해 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상승하는 과정에 겪는 희로애락은 물론 삶의 달콤함 그 자체다. 그러나 돌틈 사이에 핀 꽃을 발견하는 기쁨이나 가파른 절벽에 앙카를 박아가며 오르던 뿌듯함은, 허공으로 내몰린 그 순간 얼어붙는 공포로 일순간에 얼룩진다.

마치 정성껏 색을 쌓아가던 수채화 위에 돌연 까만 물감이 엎질러진 것처럼. 그림이 아름다웠을수록 혹은 아름다울 것이었을수록 인간은 초연할 수 없어 고통에 시달린다.

물리적인 추락으로 인해 발생할 외상의 위치나 수준을, 떨어져보지 않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 좌절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고통은 어쩌면 단지 그 사건에 국한한 일시적인 우울감으로도, 혹은 자아 정체감을 뒤흔드는 중대한 위기로도 될 수 있다.

좌절은 해롭고도 이롭다. 괴로움이 컸을수록 두려움은 더 깊이 새겨진다. 하지만 추락 후 가로로 누운 몸을 도로 일으켜 세로로 섰을 때 - 고통을 배움으로 승화시켜 제 몸에 흡수하고 한층 다져진 정신으로 다시 한번 상승을 꿈꾸며 시선을 위로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의 강인함을 실감하고 꿋꿋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

얼마 전에, 신뢰하는 동료가 낙천적인 성격을 재미있어하며 살면서 좌절해본 적 없냐고 물어왔었다.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면 ㅡ 시간이 부족했다 ㅡ 그런대로 평범하고 적당하게 둘러대고 마는게, 박영선으로 이제껏 살아오면서 완전히 버릇이 되어버려 기억도 안 나는 엉터리 대답을 했다. 그리고 또 우연찮게 어느 좌절의 경험을 상기할 일이 최근에 있었다.

음, 내 좌절의 순간 - 그건 내가 종이가 되어 꾸깃꾸깃 구겨져서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듯한 일이었는데, 사실 나같은 사람이 평생 느껴볼 거라 상상조차 못했던 감정이라 그 자체로도 스스로에게 몹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종이에서 인간이 된 나는 확실히, 저절로 인간이던 때에 비해 강하다.

그건 내가 꿈을 잃지 않기로 결정한 데서 깨달을 수 있다. 추락을 상정하고 낙차를 넓히게 될 일을 겁내는 게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얻을 더 큰 행복을 망설임 없이 추구해나가고자 하는 여전한 열정에서. 좌절이 내게 아로새긴 상처가 오히려 더 많은 감사와 행운을 느끼게 해줄 씨앗이라 여기는 이 태도에서.

그래서 지금의 난, 너무 높은 데서 떨어지는 바람에 자칫하면 나를 산산조각 낼 뻔했던 - 과거의 내 순수한 꿈들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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