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차
- 작성일 : 2022년 8월 7일
인간에게 좌절이란 절대적으로는 환산이 불가능하다. 좌절이란 글자는 세로 모양이고 운동 이후의 정지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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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과 이상에 대한 희구를 선천적으로 지닌 인간은, 특히 일정 부분 이미 그를 습득했거나 또는 충실한 노력을 들여온 인간일수록 - 추락에 의해 도달하는 위치는 같을지언정 상대적으로 더 큰 낙차로 인해 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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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하는 과정에 겪는 희로애락은 물론 삶의 달콤함 그 자체다. 그러나 돌틈 사이에 핀 꽃을 발견하는 기쁨이나 가파른 절벽에 앙카를 박아가며 오르던 뿌듯함은, 허공으로 내몰린 그 순간 얼어붙는 공포로 일순간에 얼룩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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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정성껏 색을 쌓아가던 수채화 위에 돌연 까만 물감이 엎질러진 것처럼. 그림이 아름다웠을수록 혹은 아름다울 것이었을수록 인간은 초연할 수 없어 고통에 시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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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인 추락으로 인해 발생할 외상의 위치나 수준을, 떨어져보지 않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 좌절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고통은 어쩌면 단지 그 사건에 국한한 일시적인 우울감으로도, 혹은 자아 정체감을 뒤흔드는 중대한 위기로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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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은 해롭고도 이롭다. 괴로움이 컸을수록 두려움은 더 깊이 새겨진다. 하지만 추락 후 가로로 누운 몸을 도로 일으켜 세로로 섰을 때 - 고통을 배움으로 승화시켜 제 몸에 흡수하고 한층 다져진 정신으로 다시 한번 상승을 꿈꾸며 시선을 위로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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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인간은 스스로의 강인함을 실감하고 꿋꿋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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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신뢰하는 동료가 낙천적인 성격을 재미있어하며 살면서 좌절해본 적 없냐고 물어왔었다.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면 ㅡ 시간이 부족했다 ㅡ 그런대로 평범하고 적당하게 둘러대고 마는게, 박영선으로 이제껏 살아오면서 완전히 버릇이 되어버려 기억도 안 나는 엉터리 대답을 했다. 그리고 또 우연찮게 어느 좌절의 경험을 상기할 일이 최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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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내 좌절의 순간 - 그건 내가 종이가 되어 꾸깃꾸깃 구겨져서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듯한 일이었는데, 사실 나같은 사람이 평생 느껴볼 거라 상상조차 못했던 감정이라 그 자체로도 스스로에게 몹시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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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이에서 인간이 된 나는 확실히, 저절로 인간이던 때에 비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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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가 꿈을 잃지 않기로 결정한 데서 깨달을 수 있다. 추락을 상정하고 낙차를 넓히게 될 일을 겁내는 게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얻을 더 큰 행복을 망설임 없이 추구해나가고자 하는 여전한 열정에서. 좌절이 내게 아로새긴 상처가 오히려 더 많은 감사와 행운을 느끼게 해줄 씨앗이라 여기는 이 태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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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의 난, 너무 높은 데서 떨어지는 바람에 자칫하면 나를 산산조각 낼 뻔했던 - 과거의 내 순수한 꿈들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