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도,나도 우리모두 .....
나는 24살에 남자친구를 만나, 29살에 결혼을 했다.
그 당시 초등학교1학년이였던 조카 일기장을 보면, 2008년 05월17일 이모가 결혼을 해서,
삼촌이 아닌 이모부가 생겼다라고 적혀있다.
나역시 이제는 남자 친구가 아닌 , 남편이라는 새로운 존재와 마주했고,
결혼 기념일이라는것이 나에게도, 아니 우리에게도 생겼다.
2009년 09월 이로운이라는 남자 아이가 우리 둘 사이에 태어났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매일 울었던것 같다. 갓난쟁이 로운이가 울면 나도 울고, 어찌할 바를 몰랐기에..
엄마라는 역할자의 첫경험이 내겐 참으로 크고 깊게 다가왔다.
2009년 12월 로운이가 92일째 되던날.. 퇴근길에 남편이 큰 교통사고가 났다.
이역시 내겐 첫경험이였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대수술을 마치고 나서, 며칠후에 재활만 잘하면 된다는 의사 쌤의 정확한 소견을 들었을때, 그제서야 나는
병원 로비에 앉아, 목놓아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100일이 채 되지도 않은 로운이는 어쩔수 없이 언니와 형부가 와서 강릉으로 데리고 갔고..
3개월 가량 간병인 대신, 나는 남편옆에서 산후조리겸 간병인을 하기로 결심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사실 쉽지 않은 선택이였지만, 그냥 이게 맞는것 같았다.
친정부모님께는 걱정 하실까봐 남편의 사고 소식 자체를 비밀로 했고,
회사 복직을 예정보다 당겨서 해야 해야겠다는 거짓말을 핑계로 로운이는 언니가 키워 주는걸로..
작은오빠는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을 드나들며 나를 챙겼고.
큰오빠 내외도 늦둥이 동생인 나를 챙기기 바빴다.
언니오빠들은 나를..나는 우리 남편을..
병원에서 나는 결국 젖몸살이 났고, 간호사 쌤들의 도움으로 무탈하게 넘겼다.
남편과 나는 복직해서 각자의 회사로 돌아갔다.
친정 부모님께서는 남편이 두발로 설수 있었던날 이 상황을 말씀 드렸다.
벌써 10년전의 일이다.
나는 지금 열두살 남자아이의 엄마가 되어, 제주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제 처음 만난 분이 뭐하는 분이냐며 내게 물었다.
"엄마예요!"라고 답했다. 남편은 씨익 웃었고, 로운이는 "맞아요! 우리 엄마는 엄마로 살아가요" 라고 말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살아 간다.
서툴기는 매 한가지,모두다 처음일것이다.
나름의 속도로.. 숨을 고르며.. 내삶의 조각조각을 잘 맞춰가면 되는거다.
그때의 나는, 그때의 우리는, 그때의 당신은 다시 시작한다 해도, 다시 선택한다해도
마찬가지였을까?
매순간순간 후회없는 삶을 살아 가려고 노력중인 나는, 지난날을 되돌아 보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꽤 괜찮았던 순간의 선택들이 꽤 많은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