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한 적자 생존 시스템의 장점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은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건강검진을 받고 돌아오곤 한다. 한국의 건강검진처럼 총체적이고 세세한 검사는 미국에서 같은 비용으로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비단 한국 교민에게만 보이지는 않는데, 브라질 출신의 지인도 모국을 방문할 때면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미국)는 병을 키우게 해."
맞다. 미국은 의료비가 고가이기도 하지만, 진료 예약조차 까다로워 건강에 적신호가 뻔히 보여도 의사를 제 때 만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을 방문하여 부러 건강검진을 받고 싶지는 않다. 최근 들어 더욱 그런 마음이다. 병원은 아프면 그때서야 가고, 병이 깊다면 그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 같은 시대엔 그래야 하지 않나, 싶다.
2022년 11월, 세계 인구가 공식적으로 80억을 돌파했다. "60억 지구에서 널 만난 건 럭키야"하는 노래를 딸아이와 부르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이젠 80억이란다. 출생률이 역대 최저라면서 인구가 폭증하는 속도는 어마어마하다. 애초에 인류의 개체 수가 많으니 한 부부 당 한 아이만 출산해도 인구는 쑤욱 늘고, 의료의 발달로 사망인구는 오히려 줄어들어 인구 증가세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결국 필연적으로 인구 고령화가 가속화되어 소수의 노동 인구가 다수의 노년층을 부양해야 한다. 장수를 원하는 인간 개개인에게 평균 수명 연장은 축복이었을지 모르나, 인류라는 전체 공동체와 지구라는 이 행성에게는 재앙이 아닐까.
종종 미국은 진화론 관점에서 최적의 나라라는 생각을 한다. 미국은 다인종 국가로서 혼혈 인구가 많다. 흔히들 혼혈인에 대해 외모적으로 '예쁘다,' '잘생겼다,'는 인식이 많은데 사실 과학적으로도 혼혈인은 부모로부터 우성형질을 물려 받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서로 유전적 구조가 유사한 개체가 교배하면(예: 근친교배) 열성형질이 발현되어 장애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말 중에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는데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것이, 동일민족 안에서 짝을 찾아야 한다면 나와 가장 멀리 떨어진, 나와 가장 다른 집단에서 찾는 편이 자녀에게 유전적으로 이로울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성이란 인류의 건강한 존속에 크게 기여하므로 궁극적으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제 아무리 단일민족 국가임을 자부했더라도, 결국은 인종의 다양성 속에서 살게 되리라고 나는 상상하곤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미국 내의 다양성이 진화론에 매우 부합한다고 여기는데, 요즘 들어 미국의 의료 시스템 역시 진화론적으론 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돈이 없으면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한다. 안정적인 직장이 없어 의료보험 역시 부재한 일용직 노동자라면 큰 병에 걸리거나 큰 사고에 처했을 시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진화론의 '적자생존의 법칙'에 철저하게 들어맞는 시스템이다. 병 들고 아프고 돈 없는(즉, 능력 없는) 개체는 살아남지 못하는 시스템. 우월한 개체끼리 살아남아 적정한 크기의 집단을 유지하는 시스템.
잔인하지만 인류 전체와 지구의 먼 미래를 위해서는 그런 시스템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인류의 황금기는 시나브로 저물고 있나 보다. 디스토피아 속에 아이를 태어나게 해서 또 다시 못내 미안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