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채우는 물건들
신촌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업실 겸 카페가 있다. 한 장의 LP가 줄곧 돌아가며 낯설고도 기분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주인은 핸드드립 커피를 신중히 내려준다. 공간을 슬며시 둘러보면 아름다운 것들에 시선을 빼앗긴다. 클래식한 멋이 느껴지는 원목 스피커, LP와 앨범이 가지런히 정리된 목재 책장, 미적 감각이 엿보이는 소품. 그중에서도 시선이 오래 머무른 건 창가에 쳐진 하얀색 알루미늄 블라인드다.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드리우고 그 사이로 그림자가 비친다. 창가의 책상과 의자, 곁에 놓여 있는 화분까지 음양의 줄무늬가 촘촘히 새겨진 이 공간이 마음에 들어 책 한쪽 읽었다가, 블라인드가 만들어낸 풍경을 반복해서 바라보곤 했다.
얼마 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양 팔을 뻗은 길이보다 더 넓은 창이 있는 방이었다. 바로 이전 집은 건너편 옆 동 아저씨가 시청하는 TV 프로그램이 빤히 보이는 울창한 아파트 숲이었는데, 이곳은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도심의 숲이다. 집이 거저 주는 선물을 온종일 누리고자 평소와는 다르게 가구를 배치했다. 창으로 스미는 고른 햇살에 드러눕고 싶어서 창가에는 침대를 나란히 두고, 글을 쓰다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고 싶어서 책상도 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배치했다. 큼지막한 창문에는 고민 끝에 하얀색 블라인드를 달았다. 아무래도 신촌 카페에서 본 잔잔한 풍경을 잊기 어려웠다. 카페의 감도 있는 가구와 물건은 아니지만, 내 방에도 블라인드를 투과한 빛이 책장과 포근한 이불, 벽에 걸린 포스터까지 스멀스멀 자리를 잡는다. 작업을 하다 잠시 빛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오후는 내가 사랑하는 평화로운 장면이다.
블라인드는 내 방의 충실한 오브제뿐 아니라 그날의 컨디션을 말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블라인드를 내린 길이, 슬랫의 각도에 따라 채광과 바깥 풍경이 달라져 빛을 방에 들이고 싶은 만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가뿐한 날에는 다음날 아침 빛이 머리맡에 쏟아지도록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고, 아침에 서서히 깨고 싶은 날에는 슬랫을 약간 기울여 빛이 틈 사이로 새어들게 만든다. 깊게 잠들고 싶은 날에는 블라인드를 창 끝까지 치고 빛을 차단한다.
블라인드를 들인 뒤로 작업실을 찾아 카페를 전전하던 모습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신 오늘 구름은 어떤 모양인지, 볕이 얼마나 좋은 지 살피며 자연이 만드는 그림에 매일 감탄했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집을 떠나 아침에만 잠깐 빛이 드는 내 방에서 자판을 타닥거린다. 그래도 다시 작업실을 찾아 전전하지는 않는다. 그때의 풍경도 소중하고 값지지만, 이곳에서 맞는 아침 풍경도, 큰 창 대신 옮겨 붙여놓은 초록빛 포스터도 마음에 들어서 다른 결의 위로를 받는다. 조만간 다시 바라보고 싶은 풍경을 바꿔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