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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Jan 22. 2024

시대는 어떤 형태로든 개인의 삶을 지난다

수년 전 한 여인숙을 찾았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하는 공동체 시설이었다. 그곳에서 한 중년 남자를 만났다. 그는 1997년 IMF 이후 사업이 망했다고 했다. 아내와 별거, 이혼, 자식과 헤어짐을 겪는 남자는 거리에서 노숙자로 생활했었다. 술로 지난한 하루하루를 버텼다. 어쩌다 공동체에 들어오게 됐고, 알코올 의존증을 치료하며 건강한 웃음을 되찾았다. 나는 그와 인터뷰를 통해 IMF가 무너뜨린 한 가장의 삶을 보았다.

최근 경남도립미술관 ‘보통 사람들의 찬란한 역사’ 전시를 관람했다. 전시는 시공간을 넘어 굴곡진 시대를 지나는 개인의 삶을 비췄다. 한국전쟁, 여순사건, 월남전, 오일쇼크, 민주화운동 등 한 시대의 숱한 사건은 한 개인의 삶을 추락시켰다가 되살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다시 깨달았다. 시대는 어떤 형태로든 개인의 삶을 지난다는 것을.

지난 늦여름 만난 진례면 사람들의 삶에도 여러 시대가 지나갔다. 시대의 상처가 남긴 사람의 마음에는 다양한 감정이 꽃 폈다. 내가 겪어보지 않았던 시절을 상상하며, 때론 인터뷰이가 되어 그 시절에 섰다. 치열하며, 애잔하고 헛헛한 감정이 내 마음을 지나가 눈물도 자주 닦아냈다. 한국전쟁 백마고지 전투, 월남전에서 살아남은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 새벽이슬 맞으며 일하는 딸을 도와 설거짓거리를 정리하는 노모의 사랑, 갖은 일에도 수백 년 역사의 집성촌을 지켜온 장손의 책임감. 인터뷰이들이 느낀 감정과 마음들을 단어로 잘 엮어 활자로 표현하고 싶었다. 읽는 이들에게 감정이 잘 전달되기를 바랐다.

나의 바람이 첫 번째 독자였던, 인터뷰이에게는 잘 전달됐나 보다. 며칠 전 아이를 씻기느라 정신없던 저녁, 저장돼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벨이 울렸다. 인터뷰이였다. 전화기 너머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책이 잘 나왔어, 작가님 진짜로 고생했따이, 여 백숙집 평생 무한리필이니깐 꼭 오이소, 참 고맙다.”
그는 책이 잘 나와 기분이 좋아 인터뷰이들과 술 한잔 걸치고 있다고 했다.
“저도 인터뷰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전화기를 들고 서로 경쟁하듯 고마움을 표현했다. 고맙다고 얼마나 외쳤으면, 신랑은 무슨 전화길래 그렇게 고맙다고 하느냐고 물었다. 책이 나오고 먼저 든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낯선 이 앞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껏 풀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 시간을 내어 자신의 삶을 보여준 것에 대한 고마움. 하나의 책을 만들기 위해 내어 준 마음과 애씀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수년 뒤 이 일의 끝에 내 마음에 빚처럼 남은 기획을 완성하길 바라본다. 어설픈 인터뷰로 남은 할머니의 삶을 제대로 톺아볼 능력이 생기길 기대해 본다. 한 개인의 찬란한 역사를 담을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고마움’으로 ‘진례, 시간을 거닐다.’ 출판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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