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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하 Jan 15. 2022

고적을 찾아서


 점점 외롭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점점 사라져 어딘가에 말없이 서 있기는 하겠지만 여기에는 없고 싶은 것이다. 

따뜻한 봄빛을 택하여 들녘을 떠들썩하게 지나가는 여인네들에게 깊은 산중의 고요 같은 고적함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저들의 등을 밀치는 바람엔 아직도 싸늘한 겨울의 적막함이 있을진대, 여전히 거기에 있고 싶은 것이다. 

 진종일 그 무엇도 오지 않는 텅 빈 참나무 숲 속, 인적이 없는 산맥을 따라 내려온 바람, 그리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생기들…. 그 겨울이 지닌 모든 적막의 빛이 오랜 삶을 암시하는 비문처럼 새겨져 있는 곳에, 나도 영원히 새겨져 있고 싶은 것이다.

 겨우내 새파라니 얼어 입술도 굳고, 움직임도 없고, 눈빛도 없으리라! 오직 새하얀 장막 속에서 생각을 키우며, 꿈을 만들며, 태고의 신성한 풍경이나 폐허가 된 미래의 적막한 풍경을 그리워할 것이니, 깊은 시름이 자라나는 중에도 삶을 사모하는 마음은 저의 양심에 줄 곳 비정한 쓰레기를 쌓아 가는 치욕을 담지 않으리라!


 나는 고적하고 싶은 것이다. 고적은 침묵 속에서 자라나 맑은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그러므로 겨울의 숨죽인 풍경뿐만 아니라, 침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이상스러운 이유를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고적만이 나를 정상인으로 되돌려 놓는다. 사회 속에서는 모든 사물이 흐릿하다. 질서가 있는 듯 없는 듯 혼란스럽고, 존재의 가치가 이것인지 저것인지조차도 불분명하다. 

 나는 미아이다. 더욱이 사회는 정당한 길을 가리켜 주지도 않는다. 나는 겁먹은 듯 방황한다. 태어나면서 사회적인 생활이 이토록 나를 어리벙벙하게 만들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나의 신경에는 사회의 혼잡스러운 경로를 도저히 감당치 못할 그 무엇이 모질도록 얽혀져 있는 것이다. 

 고적 속에서라면 나는 언제나 뚜렷하고 정밀한 그 무엇을 본다. 존재의 위대함이 사방에서 나타나고, 고상한 모든 것이 자라난다. 따뜻함이 가슴에 나타나고 사랑의 빛이 눈에 감돈다. 그리고 세상과 삶을 한층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사회에서 물러서는 일이 가혹할 정도로 불가능하다. 결코, 해부할 수 없이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혈연적 인연이라는 것, 사소한 형식의 틀에 묶인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 신체에 걸쳐진 모든 것에 따르는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 일개의 명예라도 얻어 남부럽지 않게 지상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것 등에 의해 일찌감치 구속된 이 생애를 탈피할 여력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생애의 잠깐, 아주 잠깐 오직 자연만의 고적한 경과 속에 자신을 묻어두고자 훌쩍 길을 떠나 깊은 산기슭 숲속 어디에선가, 개울가 어디에선가 야영 생활을 해보라. 우선 뛰어날 정도로 신고정신이 투철한 우리의 국민성을 겪는 일과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한 한낮의 무료함. 그리고 물줄기 흐르는 계곡의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밤의 이상스러운 속삭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모든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자신만을 발견한 채 금방 사회 속으로 뛰쳐나오고 말리라! 

 그러나 고적은 거기에 있다. 사회적인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묵묵히 성장하는 나무들이나 말 없는 바위, 소멸의 노래 같은 소쩍새 울음, 고요한 일출과 일몰의 태양, 무심히 유랑하는 바람과 물줄기 등에서 고적은 어린아이의 깊은 잠처럼 신성하고 정당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단지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 자신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그 빛을 가릴 뿐이다. 고적의 신성한 연극은 단편극이 아니다.



 나는 열렬히 고적 일부가 되기를 바란다. 오랜 소망이었으나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인적이 없고 침묵이 있는 곳에 인생의 요람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어본 적이 없는 산기슭이나 강기슭, 또는 고요한 호숫가의 호젓한 오두막집을 천국으로 여긴다. 거의 모든 사람의 천국보다도 훨씬 작고 초라할 테지만, 나의 경지로써 오를 천국은 틀림없이 그곳뿐이다. 그곳에서 나는 신과 인간, 그리고 야속한 사회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실만으로도 크나큰 만족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에겐 오두막을 갖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러나 내버려진 땅은 없고, 내버려진 집은 없다. 이쪽 땅은 서울사람의 소유이고, 저쪽 집은 부산사람의 소유이다. 땅은 잡초의 터전으로 방치되고, 집은 가루가 되어 주저앉아도, 그것은 그들의 재산이며 부귀의 가치이다. 또 아니면 오두막에 걸맞은 아름답고 호젓한 모든 땅, 모든 집은 대부분 보전구역, 보호지역, 군사지역 등 갖은 행정적 규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쯤 되면 소시민이며 무일푼인 나로서는 이 땅에 잘못 태어났음이 틀림없고, 그 불운한 처지를 푸념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재산을 축적하지 못한 나 외에 그 무엇을 탓할 수는 없다. 그래도 생각하자면―지구 위의 모든 땅, 모든 국가에도 나름대로 제약이 있겠으나, 나의 이 조그만 조국보다야 더하겠는가.


 이따금 세계지도를 펼쳐놓는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운 경지를 무일푼으로도 소유할 수 있고, 소유에 따르는 조직 사회의 절차나 규제가 전혀 미치지 않는, 그야말로 천혜의 기적처럼 자유롭게 자연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대지를 찾아 여행해 본다. 

 아마존 유역이나 콜로라도 강의 어느 강변, 앙골라의 밀림지대나 히말라야산맥의 어느 기슭, 스위스 고원지대의 천연 호숫가나 중국의 계림 같은 지역 어딘가는 필경 그 무엇도 제약받지 않을 전인미답의 아름다운 풍경이 홀로 숨어있을 것이다. 그런 곳이라면 나는 대뜸 눈물을 흘리며 오랜 땀 냄새가 밴 배낭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마지막 정착을 위한 오두막을 통나무나 흙으로 정성스럽게 지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오두막을 짓는 일은 현실적인 소망이며, 세계의 지도를 따라 방랑하는 것은 이상적인 꿈이다. 제아무리 소망이 간절해도 불가능한 일을 기대할 수 있으랴. 고적한 곳을 찾아 오두막을 짓는 일이 내게는 현재로서 가장 신성한 예식일진대, 막막한 꿈으로 대륙과 대륙을 방랑할 수는 없는 일. 내 조국의 정밀한 지도로부터 언제나 탄식만을 얻고 나오지만, 그래도 나는 내 조국 어딘가에 언젠가 틀림없이 오두막을 짓고 싶은 것이다. 



 인적이 없는 곳이라면 틀림없이 고적하다. 아름다운 자연의 배경은 그 풍미를 더한다. 텅 빈 들녘, 깊은 밤, 한 송이의 애처로운 들꽃도 고적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들의 고적은 시간과 오감의 극히 일부에 반영된다.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딜 때, 그의 발 앞쪽에 아스라이 깊듯이 펼쳐진 영원한 정적의 감응도 고적일 테지만, 완전한 죽음 같은 그런 고적을 취할 바는 아니다. 

 계절의 풍상 속에 다채로운 물상들이 시시각각 넘나드는 우주의 전체성이 있는 곳, 거기서 나타나는 고적 속에 나는 비로소 오두막을 짓고 영구히 자라나고 싶은 것이다. 오두막이 지어진 곳에서는 씨앗을 뿌려놓고 파란 싹이 돋아나기를 기대하는 일과 대양과 대륙으로 불어 가는 바람 속에 꿈으로 만들어진 기도의 편지를 띄워 날리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만이 희망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은 희망이었으면 하지만,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에 추호도 의심이 없는 여전히 기세 좋은 열정적인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할 정도로 완곡한 주장을 펼칠 바는 아니다. 만약 이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 진정한 고적을 찾은 어느 날, 당신 운명의 귓전에 한번쯤은 고적의 지혜를 고요히 낭송해 보리라! [1985년작] 


[사진출처] ALL PIXBAY -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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