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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하 Feb 14. 2024

노을 속의 행복

고운하 저서 「문밖의 순수」 중에서

   


  노을 속을 걷는 당신들은 참 아름답다. 한 명은 키 크고, 한 명은 키 작은 당신들은 손을 잡고 팔을 흔들며 걷는다. 이따금 고개도 돌려지고 머리채가 휘날린다. 당신들은 두 개의 검은 실루엣이다. 그렇게 검지만 검은 옷을 걸친 것이 아님을 안다. 마냥 어둡지 않고 탁하지 않다. 달밤의 흰 눈 같은 부분도 보이고, 촛불 비치는 벽면 같은 노르스름한 부분도 보인다. 멈춰진 장면이라면 진한 농담을 지닌 고풍스럽고 우아한 화첩일 터이다. 그러나 조곤조곤 돌아가는 영상처럼 당신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둘이 어떤 즐거운 이야기인가? 작은 키를 가진 실루엣의 흔들흔들 어깨춤까지 있다. 남몰래 행복에 젖게 되는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어떻게 저들이 저토록 아름다워 보일까. 노을의 배경 때문이다. 저들은 노을 속의 강변길을 걷고 있고, 산길에 나섰던 나는 건너편 나지막한 동산의 숲 중턱에 앉아 잠시 하산 길에서의 숨을 고르고 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전혀 다른 풍경으로 있는 우리들 배경에 10월의 감빛 노을이 있다. 노랗게 번져서는 붉게 익어가고 있는 감빛 노을 말이다. 이것은 정말 우리의 축복이다. 뜨거워도 괴로운 일이요, 추워도 괴로운 일인 우리에게 노을은 중화의 안식이다. 더없는 부드러움이 있고, 더없는 감미로움이 있다. 이 바탕은 우리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행복, 행복의 바탕이다. 


  노을이 자욱한 때면 가까운 곳의 물상 외에는 대부분 정밀함을 감춘다. 빛의 선별이 사라지고, 노동의 땀방울이 감춰지고, 길도 진로가 아닌 지평선이 된다. 가까이 있어 정밀한 것들도 사실 마찬가지기는 하다. 눈에서만 정밀할 뿐 마음에선 이미 한 치의 틈도 없이 꿰매어진 철저한 날카로움이 삭고 있다. 결국 노을이 자욱하면 모든 선이 경계를 허물고 서로와 서로에게 안기며 가득한 자애의 미소를 갖는다. 노을은 이렇게 선량하다. 자신에 물든 저쪽 당신들과 이쪽의 나를 태초의 선으로 미화한다.      

  그러기에 나에게 있어 노을은 종교처럼 영적인 빛이다. 노을빛은 위대한 경전이며 영속적인 안식을 설파하고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생의 시작과 끝이 없음을 느낀다. 그 순간 은원이 득실대는 삶에 초연해지고, 이를 궁극적 평화로 여긴다. 이러한 감정엔 계산이 없다. 잔잔히 물드는 순수 그대로이다. 이처럼 노을은 종교의 경전과 다르게 해석이 분분치 않다. 내가 더욱 매료되는 이유이다. 노을은 순수의 전유물이다. 오직 아득히 빠져드는, 아련히 젖어 드는 단순함 속에 무량한 삶의 가치가 일어난다.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모든 것이 이대로 기를 바라는 뜨거운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나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평화의 기도를 갖는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주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진실로 순수한 마음이지만, 이 순수한 마음의 뿌리에는 매우 역설적인 혼탁함이 있다. 부모에게, 연인에게, 그리고 또 누구에겐가 무엇엔가 상처를 준 지난날의 암흑이 있는 것이다. 정말 가슴이 아프거나 몸서리치도록 부끄러운 암흑이다. 영원히 후회되고 있는 매우 진한 암흑이었기에 나는 이리도 평화를 기도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에도 마찬가지다. 곤충의 소리, 꽃들의 아름다움, 흐르는 물결과 바람 등이 하염없이 평화롭기를 기도한다. 

   아쉽게도 평화를 기도하는 상태는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일이 정해진 제식처럼 고정적인 것도 아니다. 나의 평화의 기도는 타율적으로 어떤 분위기를 탄다. 내가 겪어온 바에 의하면 그런 분위기는 자연에서 풍겨오고 사람에게서 풍겨오지만 자주 있지 않고, 몇 가지가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긴밀한 분위기는 자연의 어떤 모습에 동화되어 넋을 잃는 분위기다. 모든 시공간을 초월하는 상태에 빠지는 넋 말이다. 이러한 넋에 빠지는 분위기를 말할 때 망설임 없이 언급할 수 있는 것이 노을이다. 


  지금 그 노을 속에 당신들이 걷고 있다. 내 평화의 기도를 눈물겹게 하는 고운 가사처럼 아름답게 걷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당신들이 바람에 흐트러지는 모습을 누가 바랄까. 그 누구든 그저 한없이 저 모습 저대로 기를 바랄 것이다. 모두 평화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아름다울 테니 말이다. 

  둘이 쪼그려 앉은 모습도 아름답다. 무엇인가를 발견했나 보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들꽃이다. 10월의 처녀들인 쑥부쟁이일까, 작디작은 보랏빛 꽃을 피운 쥐꼬리망초일까? 일어선 당신들의 손에 아무것도 들린 것이 없는 것을 보니, 어느 꽃이든 당신들에게 여리고 순한 미소를 띠었나 보다. 아니면 들꽃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을 피웠을 수도 있겠지만, 그 무엇이었든 노을이 장식한 당신들의 실루엣은 인간의 최상이자 최고의 미학이다. 

  이 순간 나는 삶의 거룩함을 믿게 된다. 이런 믿음의 힘은 정말 신비롭다. 맨날 난장판인 삶을 순정의 면사포로 덮어주고, 맨날 시름없는 인생을 따스한 훈향으로 덮어준다. 노을 속의 장면은 이렇게 곱디고운 행복으로 영근다. 노을 앞에서 곧잘 넋에 빠지는 이유가 달리 있으랴. 깨치기 싫은 순간임을 영혼이 제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걸핏하면 노을에 붙잡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기에 걸어도 멀어지지 않는 당신들에게 노을은 무엇일까? 알 수가 없다. 같은 노을 하늘 아래에 있어도 나는 앉아 넋을 놓고 있는데, 당신들은 노을과 무관한 것처럼 계속해서 참새처럼 조잘대고, 무대 위의 배우 마냥 모녀의 사랑에 대한 열연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들의 열연이 단순할까. 나는 믿는다. 당신들은 그윽하고 따뜻한 조명의 분위기를 타고 떨리는 감정 없이 안정된 숨을 쉴 수 있기에 열연이 절로 나오는 것이라고. 결국 지금의 당신들의 아름다움은 노을의 조력에서 이렇게도 생생한 것이다.  

   당신들의 모습이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의 존재는 소나무에 가려지고, 흙 위에 철퍼덕 퍼질러 앉았어도 당신들의 멋진 공연만 있어 준다면 나는 항상, 항상 미소를 지으며 꿈꾸는 관객으로 정물화 될 것이다. 그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결국 당신들의 평화가 나의 행복이라는 것을 10월의 감빛 노을 속에서 이렇게 깨닫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또 기도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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