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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하 Feb 15. 2024

댄서, 그 자생의 꽃들

저서 [색의 길] 중에서


    몇 가지 이유로 상당한 소요가 일어나는 댄스공연이다.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 아래 온통 드러내놓은 미끈한 몸매와 흰 살결이 그렇고, 원색적 무복이 푸른 녹음을 배경으로 강렬하게 펄럭이는 것도 그렇고, 댄서들이 외국 여성들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녀들의 율동을 경쾌하게 받쳐주는 빠른 박자의 배경음악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요소가 단순할 수가 없다. 한순간 시작되는 현란함으로 말미암아 공연히 시작되기가 무섭게 사방팔방에서 다양한 형태로 피서를 즐기던 얼굴들이 물가의 작은 수변 무대로 쏠린다. 

   도시인들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밀짚모자를 쓴 나도 저들의 눈에 들리라. 내가 있게 된 위치가 바로 무대 곁인 까닭이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공연이기에 여성 댄서들의 짙은 화장까지 뚫고 들어가 주름과 나이까지 가늠할 정도이고, 그녀들의 분향과 숨결 소리까지 들을 정도이다. 그녀들 생명의 활기가 순식간 내 심장박동에 활력을 준다. 지척에서 손뼉을 크게 친 탓에 그녀들의 눈웃음까지 얻는 즐거움은 노인인 내 얼굴에 순정의 부끄러운 화색을 물들이기까지 한다. 그냥 지나쳤으면 참 억울했을 만한 일이다. 

   무대 뒤가 길인데 그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나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는 순간 공교롭게도 음악이 튀밥처럼 요란스럽게 터져 나와 코를 절로 킁킁거릴 만한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귓전에 울리는 명랑하고 경쾌한 낯선 음악은 우리나라 풍의 음악이 아니요, 그 음악을 실어내는 웅장한 음향은 자연의 소리만이 세월을 적시고 가는 이 시골 땅에 낯익은 소산물이 아니었다. 신기함만으로도 가던 길 멈춰 서는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뜬금없이 묶여버린 발. 평소 사람들의 축제에 무심함을 갖고 있던 나의 태도가 우습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세계로 변화를 이끄는 일임을 자각하게 하며, 흥미로운 일임을 판단케 한다. 이 순간부터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현장을 아낌없이 받아들이기로 한다. 여차하면 떠나려고 부여잡고 있던 자전거를 아예 정착시켜 놓고, 축대로 쌓여 있는 돌바닥에 주저앉아 무대로 시선을 돌린다. 순식간 제대로 공연을 즐길 준비를 한 것이다. 동시에 1막이 끝났고, 곧바로 더욱 열정적인 음악이 터진다.  

   옷을 갈아입는 속도가 전광석화인지 빠른 음악의 박자에 걸맞게 댄서들의 등장도 빠르다. 해바라기처럼 환한 반라의 미녀들은 목석같은 내 눈에, 또는 이 푸른 골짜기에 여왕들처럼 군림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역시 그녀들은 불볕에도 굴하지 않고 턱을 도도하게 치켜들고는 들고는 거침없이 무대를 휘젓는다. 그녀들이 흰 살결이 수면을 튀는 숭어처럼 반짝이고, 그녀들의 원색 무복들은 인생의 삶과 의식에 대해 매우 명료한 감정을 나타낸다. 화장과 미소로 무장한 표정은 레드카펫 위에 선 여배우 이상의 기품과 영광을 받는 양 태양처럼 빛난다. 참으로 매혹적이다.


   댄스는 그녀들의 백옥 같은 팔다리와 허리에서 나타난다. 춤은 분별 되지 않고 어떤 때는 브라질의 삼바로 여겨졌다가 어떤 때는 스페인의 플레밍고 댄서, 레징카댄스, 파리의 물랭루즈 캉캉 같은 춤으로 여겨진다. 아쉽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티베트 장족의 춤은 없지만, 어느 춤이건 춤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고 정확한 분별력도 없다. 그러나 댄서들의 신체 부위가 갖는 태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고 거기에 생활 속에서 획득된 상식이 작동되어 무의식적으로 어떤 춤은 열정의 삼바 댄스요, 어떤 춤은 순결한 레징카 댄스요, 어떤 춤은 요색의 캉캉 댄스라는 느낌은 어느 정도 갖는다. 더군다나 음악의 리듬이 춤의 종류에 따른 분위기를 조율하고 있어 도움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메들리로 연결되는 배경적 역할을 하는 탓에 음악 역시도 정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대체로 신체 부위의 유연성과 격렬성에 따라 색다른 춤의 맛이 피어오를 뿐이다. 

   신체의 몇 부위만으로 다양한 춤의 해석을 끌어내는 그녀들은 대단한 댄서들이다. 비록 시골의 작은 축제 무대에 올라서 있지만, 그녀들이 장악한 이 순간의 시공간은 하나의 크나큰 세상으로 누군가의 인생이 삶의 확장성을 갖도록 하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나 또한 그녀들의 화려한 율동에 매혹되어 삶이 유연해지는 의미와 열정적인 삶의 가치를 은연중에 얻고 있지 않은가! 아무런 대가 없이 발만 멈추고 앉아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한 감정이 들 정도이다. 특히 격조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저들 댄서들의 예술적 율동과 이곳 시골, 자연, 그리고 나에 대한 조합이 어떤지가 새삼스럽게 의식된다. 

   화려한 댄서들의 예술적 율동과 시골은 아무래도 이질적이다. 만약 관객들이 죄다 나 같은 촌로나 농부들이었다면 이 공연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이며, 댄서들에게 농부들이 농부들에게 댄서들이 어떻게 보일까? 혹 서로에게 멋쩍은 모습은 아닐까? 이 장면에서 남모를 웃음이 터진다. 밀짚모자를 쓰고 고무신을 신은 채 화려한 문명의 예술을 접한답시고 퍼질러 앉아 있는 내 꼴 때문이다. 다행히 피서철에 힘입어 관객 대다수는 문화를 많이 접하는 여유만만한 도시의 피서객들이다. 댄서와 자연은 서로에게 순수일지 모르겠다. 불순한 감정 없이 동화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다만 화려한 무복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댄스만큼은 푸른 숲에 이단적인 모습일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 물고기 베타의 현란한 지느러미와 같은 특이점이 있는 자연의 신비를. 그러니 이도 조화롭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연의 포용력에 대한 믿음만이 확인된다. 


   불볕더위인 데다가 집중도가 낮은 열악한 공연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화려하면서도 격렬한 개화의 절정을 펼쳐준다. 자생의 꽃들과 같다. 아무리 고적하게 자랐어도 자기 생애에 치열한, 그래서 충만한 힘을 갖고 보란 듯이 피어나는 꽃들, 그녀들은 자신들의 춤 공연에 이처럼 정직하고 충실한 꽃들이다.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눈이 시큰할 정도로 보고 또 빤히 본다. 정말 아름답다. 

   나에게 뜬금없는 이 공연은 사실상 나의 혼이 머리를 조아려야 큰 영광의 공연이다. 공연이 끝나자 세상이 한층 풍요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




[사진] ALL PIXBAY -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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